- 美 정상회담 역사상 메뉴판 사인 단 4차례…대부분 '공동 사인'
- 단독 사인은 의전 벗어난 사례…'하향식 시혜 제스처' 비칠 수도

지난 25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인이 들어간 오찬 메뉴판을 건넸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메뉴판에 사인한 것은 200년 미국 외교사에 단 세 차례뿐이었고, 그마저도 모두 상대 정상과 함께한 '공동 사인'이었다. 이번처럼 외국 정상에게 '단독 사인 메뉴판'을 건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통상 정상회담에서 교환되는 선물은 국가적 상징을 담은 공예품·예술품, 또는 '공동 합의문' 같은 무게 있는 기록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회성 소비품인 메뉴판이 선택됐다. 일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즉흥적 성격과 친화적 제스처의 연장선”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외교 의전의 관례상 전례 없는 장면이었던 만큼 ‘한국에 대한 격을 낮춘 선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의 ‘메뉴판 사인’ 사례, '메뉴의 구성', 그리고 이번 회담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그 속에 담긴 상징적 뜻이 뚜렷해진다.
● 역사적 전례 – 언제나 ‘공동 사인’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이후, 미국 외교사에서 역사적으로 메뉴판 사인은 극히 드물게 확인된다. 특히 정상 간 사례를 보면, 1941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미국 해군 중순양함 USS 오거스타 회동에서 만찬 메뉴에 나란히 사인을 남긴 것이 첫 사례다.
이른바 '대서양 회담'이라고 불리는 이 회담에서 두 정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논의하며, 사인을 통해 동맹의 결속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40여 년이 지난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 방문한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멕시코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오찬 자리에서 메뉴판에 공동으로 사인을 남겼다. 당시 멕시코는 국제 유가 하락으로 대외 부채가 급증해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러나 직전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의 중남미 군사개입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멕시코는 미국에 대해 불편함이 있었다. 미국 또한 중남미 좌익 정권들에 비교적 우호적인 멕시코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레이건-포르티요 회담을 계기로 냉랭했던 1970년대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는 '정상급 대화의 복원'으로 도약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또한 그로부터 20년 뒤인 2001년,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자신의 텍사스 크로퍼트 사유지 '프레리 채플 랜치'로 불러 만찬을 가졌다. 두 정상 역시 만찬 직후 메뉴판에 공동으로 사인을 남겼다. 이는 9·11 테러가 있은지 두 달여 뒤의 시기로, 푸틴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공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직후였다. 이 장면은 냉전 이후 러시아 지도자가 미국과 강력한 보조를 맞춘, 이른바 미·러관계의 '허니문 시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례로 기록된다.

이처럼 위의 세 전례는 모두 공동 사인을 메뉴판에 남긴 것으로, 자유세계의 동맹과 협력을 각인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메뉴판에 사인해 '회담 기념품처럼 단독으로 증정한' 것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 단독사례 – 국가 정상 외 인물 대상
물론 정상 간 오찬이나 만찬이 아닌 경우 미국 대통령이 메뉴판에 단독으로 사인을 남긴 전례는 드물게 존재한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은 노벨상 수상자 초청 만찬에서 당대 지식인들과 함께 메뉴판에 사인했다. 1967년에는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백악관 국빈 만찬에서 민주당 원로 정치인들과 함께 메뉴판에 공동 사인을 남긴 바 있다. 그리고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정국 속에서 당내 정치인들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모임에서 메뉴판에 사인한 사례도 있다. 1983년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쿠바 독립 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한 식당을 방문한 후 남긴 사인도 존재한다.
그러나 위 사례들은 모두 '국내 정치적 의미'를 가진 특정 행사 차원의 기록일 뿐, 외국 정상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상대 국가의 정상을 존중하며 ‘회담 기념품'처럼 단독 증정된 경우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쪽의 일방적 사인이 마치 “이거나 받아라”라는 식의 뉘앙스를 상대방 정상에게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하향식 시혜 제스처'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뚜렷한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자리라면 몰라도, 외교 석상에서 주권 국가의 정상은 국력의 크기와 무관하게 동등한 수장이다. 그렇기에 매체가 메뉴판이든 무엇이든 원칙은 공동 사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례다. 따라서, 단독 사인 증정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더구나 상대국 정상에 대한 선물로 메뉴판 사인을 주었다는 형식 자체도 문제다. 이는 상대방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정성스러운 외교 선물이라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사인 하나 해줄게" 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장면은 회담을 대등한 정상 간 회담으로 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오해를 남길 수 있는 대목이란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한국 외교의 위상을 놓고 여러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는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 李 대통령의 메뉴판 - 식탁의 정치학과 다른 풍경
아울러 이번 정상회담 메뉴인 '샐러드 오찬'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인해 건넨 메뉴판의 메뉴 자체도 외교적 오찬의 격과 상징성을 담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실제 외교 무대에서의 오찬이나 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이른바 '식탁의 정치학'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상징적 의미를 지녀왔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쌀과 생강이 포함된 식사를 대접 받으며 한국인의 식문화를 존중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산 와규 스테이크, 그리고 한국 배와 미국 배를 섞은 디저트를 대접받아 '양국의 조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게살 케이크, 갈비찜, 된장 캐러멜 소스로 만들어진 바나나 스플릿' 이라는 풀코스를 대접받으며 동맹 70년의 의미를 식탁에 각인했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의 오찬이나 만찬 메뉴는 정치적 언어로 통한다. 미국도 이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활용해왔다. 1939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 국왕 조지 6세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미국식으로 꾸민 만찬을 제공하며 '형님' 국가였던 영국에 미국의 풍요와 성숙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게 전통적 영국 요리를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만찬을 대접해 두 나라의 조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와 비교하면 이재명 대통령의 사례는 달랐다. 당시 오찬 메뉴도 샐러드 위주의 단출한 구성이었다. 대통령실 강유정 대변인은 이에 대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일종의 닭고기 종류의 음식과 커피 등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메뉴판과 관련 보도를 자세히 살펴봐도 정확한 닭고기 종류의 음식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호텔사업으로 부를 쌓은 트럼프 대통령은 식탁의 정치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다. 그는 즉흥적 언행을 하는 듯 보이지만 베스트셀러『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 을 집필한 협상의 달인이기도 하다. 실제 시진핑 주석과의 만찬에서 미국식 요리를 선사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은 식탁을 치밀하게 연출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단독 사인 메뉴판을 건넨 것은 이번 회담을 주권 국가 사이의 협의보다는 협상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방미를 통해 이재명 대통령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 더해 100대 이상의 항공기 구매, 그리고 주한미군 기지 부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 압박 등 추가 청구서를 받아 왔다. 그럼에도 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이나 합의문은 하나도 없다. 이를 두고 곧 향후 협상이 더 불리하게 전개될 전망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메뉴판 회담'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지적이다./연태웅 기자 abraham.yeon@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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