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대우교수/한국핵안보전략포럼 편집기획부위원장

지난 8월 26일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표면적으로는 실무 협의 성격이 강했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가 지켜본 외교 무대였다. 협상 결과는 실무진이 뒷받침할 수 있지만, 대통령이 국제사회 앞에서 던지는 몇 마디는 대체 불가능하다. 그 짧은 순간은 국가의 위상과 전략을 각인시키는 장면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전 자신의 SNS에 도발적인 발언을 남겼다가 회담장에서 이를 아무 일 없다는 듯 무마했다. 이는 그의 전형적인 정치 기법이다. 스스로 긴장을 조성한 뒤 이를 해소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협상 성과를 과대 포장하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 일각은 이를 이재명 정부의 성과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상 트럼프의 퍼포먼스 정치에 휘말린 결과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화술 중에는 긍정적 요소도 있었다. 그는 트럼프를 평화를 이끄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 자신을 그 과정을 돕는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로 비유하며 회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북한 개방과 관광호텔 건설 발언도 자연스럽게 들렸지만, 평화와 경제 협력을 연결한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언급은 회담의 공기를 좋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분위기를 띄운 뒤 한국의 전략적 어젠다를 세계에 각인시킬 결정적 언어는 나오지 않았다. 외교의 본질은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니라, 국가의 비전과 주권을 드러내는 발언에 있다.

역사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1958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과 서독 아데나워 수상의 회담은 단순한 양자 회담을 넘어 유럽의 미래를 규정한 사건이었다. 드골은 아데나워를 단순한 협상 상대가 아니라, 독·불 화해를 넘어 유럽 통합을 열어갈 역사적 인물로 보았다. 그런 시각이 그의 외교를 전술적 차원을 넘어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세 가지 조건을 분명히 제시했다. 전후(戰後) 국경선을 인정할 것, 핵무기 보유를 포기할 것, 통일 문제에 인내할 것. 이는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프랑스의 사명과 유럽의 비전을 규정하는 언어였고, 훗날 엘리제 조약으로 이어져 유럽연합의 초석이 되었다. 지도자의 언어가 역사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또한 드골의 태도는 언어에 대한 철학에서도 분명했다. 그는 “미국은 큰일에 임할 때 단순한 감정과 복잡한 정책을 쓴다”고 말하며 메시지와 전략의 결합을 통찰했다. “메시지와 전략의 결합”은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언어적 메시지와 뒤에서 돌아가는 치밀한 정책적 계산이 맞물려서 하나의 효과적인 정치·외교 행위가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대중에게는 간명하고 감정적으로 호소력 있는 언어를 던지면서도, 실제 행동은 매우 계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처럼 겉의 메시지와 이면의 전략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지도자의 언어는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전략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또 “국가지도자는 주권의 상징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드골은 기자회견에서도 즉흥적 대응을 피하고, 사전 질문을 받아 준비했다. “지도자는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져야 하므로 즉흥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발언은 곧 주권의 행사이자 역사적 책임이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이 제시했어야 할 어젠다는 분명하다. 예컨대 원자력 기술을 에너지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산업·환경 전략으로 확장하기 위해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의 필요성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 또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추진과 미국의 협력 요청도 반드시 언급했어야 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세계 앞에서 천명했다면, 이번 회담은 단순한 아첨과 분위기 조성의 장을 넘어 한국의 전략적 비전을 각인시키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 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첫째, 트럼프식 퍼포먼스 정치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화술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 국가 비전을 압축해 전달할 수 있는 상징적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셋째, 협상 상대를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 드골이 아데나워를 단순한 상대가 아닌 유럽 통합의 동반자로 보았듯, 한국의 지도자도 세계사 속에서 미국 대통령을 읽어내야 한다.

이번 회담은 준비된 한마디의 부재를 드러냈지만, 그것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국가지도자의 언어는 주권의 상징이며, 역사적 책임이다. 위대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 역시 한국을 어떻게 기억하게 할지를 결정한다. 다음번 정상외교에서는 분위기를 맞추는 아첨의 언어가 아니라, 역사에 남을 언어를 준비해야 한다. 그 한 문장이 한국 외교와 안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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