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가 상승 압력, 고금리 장기화, 노동력 부족 '3중고' 직면
- '전시경제는 신기루', 재정 악화로 부가세 등 대규모 증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에 참석했다./AP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에 참석했다./AP

우크라이나 침공 4년차를 맞은 러시아의 경제가 둔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시경제와 에너지 수익에 기대온 성장 모형은 물가 상승 압력, 고금리 장기화, 노동력 부족이라는 '3중고'에 부딪혔다. 재정도 어려워져 부가가치세(VAT)를 20%에서 22% 인상하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내수에도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유럽연합(EU)의 19차 제재는 러시아산 LNG 전면 금지, 가상자산 봉쇄까지 포함해 러시아가 받는 압박 강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러시아는 ’종이호랑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평가 절하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3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성사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뒤 트루스소셜에 “러시아의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러시아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목격한 만큼 나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싸워 본래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과 인내, 특히 나토의 재정적 지원이 있다면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원래 국경선을 되찾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경제 위기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상황이 갈수록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인 셈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막심 레셰트니코프 러시아 경제개발장관은 지난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숫자를 보면 (러시아 경제가) 식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침체로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부가 경기침체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다. 

실제 군수 경제의 호황을 누린다고 자화자찬했던 러시아의 경제성장률 흐름은 꺾였다. 2021년 5.9%에 달했던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2022년 1.4%로 급락했다. 2023년과 2024년엔 4.1%로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올해는 둔화세가 뚜렷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러시아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5%에서 0.9%로 하향 조정했으며, 러시아 재무부도 2.5%에서 1.5%로 낮춰 제시했다.

러시아 중앙은행(CBR)의 엘비나 나비울리나 총재는 SPIEF에서 물가상승률 목표치 4%를 고수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러시아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0%대 혹은 –0.5%에서 -1.2%의 역성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기준금리는 지난 6월부터 4개월 연속 내려갔음에도 현재 17%로 주변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이로 인해 기업의 이자 부담이 치솟고, 소비는 더욱 얼어붙고 있다.

실물 경제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의 산업생산 증가율은 2024년 하반기 3.9%에서 올해 상반기 1.4%로 크게 하락했다.

노동력 부족도 심화되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러시아가 구(舊)소련 해체 이후 가장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노동부도 2030년까지 240만명 부족을 전망한다. 전쟁 동원, 해외 이주, 외국인 노동자 이탈 여파다.

현재 실업률은 최저, 실질임금은 고점이지만 이는 전시 발주와 재정 버팀목에 의존한 임시 안정, 즉 모르핀 주사일 수 있다. 전시경제 모드의 군수 산업 중심으로 인한 ‘신기루 현상’라는 것이다. 

발트해 인근 러시아-독일간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 시설./연합
발트해 인근 러시아-독일간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 시설./연합

재정의 핵심인 석유·가스 수익은 둔화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번 달 러시아의 국영 석유·가스 판매 수익은 5920억 루블로 지난해 동기 대비 -23%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정부 수입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석유 및 가스 수익 감소는 러시아 경제에 치명타가 될 공산이 크다. 

국제유가도 러시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세계 3위 산유국인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석유와 천연가스 판매로 전쟁 경비를 충당했다. 그러나 올해 시작된 무역전쟁과 중동전쟁, 그리고 중국의 경기 둔화가 맞물리며 국제유가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최근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이 강타당했다. 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8월 이후 러시아 38개 정유시설 중 16곳이 타격을 받아 정제 능력이 하루 100만 배럴 이상 축소됐다. 그 결과 디젤 수출은 2020년 이후 최저로 내려앉았다.

우크라이나의 ‘석유 인프라 공격’으로 인해 러시아 내 휘발유 부족도 겹쳐 내수 공급 불안이 커졌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의 석유 정제량은 현재 5분의 1가까이 감소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석유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석유 수출의 주요 시장이던 유럽과의 거래가 어려워지면서 러시아는 아시아로 수출처를 다변화했지만 이마저도 제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에 대한 압박을 인도와 중국에 가하고 있다. 유럽은 지난 19일 19차 대러 제재 패키지를 통해 러시아산 LNG 수입의 전면 금지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3년 간의 전쟁 비용을 석유와 정제 제품 수출 및 국민 복지기금(NWF) 소진으로 충당해왔다. NWF 기금은 과거 석유와 가스 수출로 벌어들인 초과 수익의 적립금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이제는 흔들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 정부는 내년부터 부가가치세(VAT)를 20%에서 22%로 인상한다. 이번 인상은 올해 초 누진세 개편, 기업 부담금 인상에 이은 두 번째 대규모 증세다. 부가가치세는 지난해 러시아 정부 세수의 약 15%를 차지했으며, 올해도 비중 확대가 예상된다.

러시아가 대규모 증세에 나선 것은 재정 여건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올해 1~7월 러시아의 연방 재정적자는 4조8800억 루블(약 81조원)로 이미 정부의 연간 목표치를 초과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민간경제의 전시경제로의 전환으로 경기 과열·세수 호조가 있었지만 올해 급랭하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경기가 냉각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6월 경제 각료들과 만나 “성장과 구조 변화의 균형”을 주문했다. SPIEF에서는 “우크라이나와 가능한 빨리 종전하기를 원한다”라고 밝혔다. 군수 중심 성장으로는 민간 활력을 대체하기 어렵고, 전시경제의 한계는 더욱 노출되고 있는 데 따른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처럼 러시아는 이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종이호랑이가 돼 가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연태웅 기자 abraham.yeon@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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