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24일,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내각총리대신이 취임 후 첫 소신표명 연설에서 납치문제를 "내각의 최중요과제"로 규정했다. 28일에는 방일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요코타 사키에를 비롯한 납치 피해자 가족들을 면담하며 해결 의지를 재차 표명했다. 트럼프는 "일본인 납북 피해자 문제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다"며 "미국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로 취임한 다카이치가 납치 문제 해결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북한은 2002년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지만, 17명의 공식 피해자 중 5명만 돌아왔다. 12명은여전히 행방불명이며, 일본 정부는 모두 생존해 있다는 전제로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1970년대 해변에서 실종된 13세 소녀부터 시작된 국가적 트라우마이자, 일본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2024년 3월 북한이 모든 접촉을 거부하면서 외교적 돌파구는 더욱 요원해졌다. 피해자 부모 세대는 한 명만 남았고,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 납치 문제는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이를 "국가주권 침해"로 규정하며, 북일관계 정상화의 절대 조건으로 설정했다. 47년간 지속된 이 비극은 왜 해결되지 않는가?
그 역사를 추적한다.
1970년대 해변의 실종: 납치는 이렇게 시작됐다.
1977년 11월 15일 저녁, 니가타시에서 13세 소녀가 사라졌다. 요코타 메구미는 배드민턴부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600미터 구간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됐다. 이것이 일본이 공식 인정한 첫 번째 납치 사건의 시작이었다. 외무성과 납치문제대책본부 공식 자료에 따르면, 메구미의 사건은 북한 공작원이 일본인을 조직적으로 납치한 17건의 사례 중 하나다. 납치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일본 본토 해안가는 물론 유럽에서도일본인이 실종됐다.
니가타현에서만 5명이 사라졌고, 후쿠이현과 가고시마현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으며, 일부는 커플이 함께 납치됐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해변이나 해안 근처에서 실종됐고, 목격자는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 실종들을 단순 사건으로 치부했다. 경찰은 가출이나 해난사고로 처리했고, 주요 언론은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산케이신문의 아베 마사요시 기자만이 유일하게 1980년 1월 "외국 정보기관 관여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작은 기사만, 아사히와 마이니치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17년간 계속됐다. 1988년 3월 26일, 가지야마 국가공안위원장이 국회에서 "북한에 의한 납치 의혹이 농후하다" 고 답변했다.
그러나 주요 신문들은 이 중요한 정부 발언조차 보도하지 않았다. NHK의 해당 국회 답변 영상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일본 언론의 이 집단적 무관심은 납치문제가 20년 넘게 수면 아래 머물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됐다.
전환점은 1997년 3월 25일이었다. 탈북한 북한 공작원 안명진이 "평양에서 요코타 메구미를 봤다"고 증언하자, 요코타 부부는 20년간 숨겨온 딸의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날 설립된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연락회"(가족회)는 아리모토 게이코, 이치카와 슈이치, 마스모토 루미코 등 다른 실종자 가족들도 결집시켰다.산케이신문의 메구미 실명 보도는 신문협회상을 받았고, 이후 모든 주요 언론이 일제히 보도에 나섰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정부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고, 북한과의 모든 외교 접촉에서 납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997년 8월 가족회는 60만 명의 서명을, 1998년 8월에는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총리실에 제출했다. 2024년 1월까지 누적 서명은 1,722만 명을 넘어섰다. 가족회 결성과 함께 1998년 구출회(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가 설립됐고, 1997년 4월에는 초당파 국회의원연맹인 납치의련도 출범했다. 이 세 조직의 연대는 납치 문제를 일본 정치의 중심 의제로 끌어올렸다. 블루리본 배지 캠페인도 이 시기 시작됐다.
정부 공식 설명에 따르면, 파란색은 "피해자의 조국 일본과 북한을 가르는 동해의 푸른 바다"와 "피해자와 가족을 유일하게 연결하는 푸른 하늘"을 상징한다.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2025년 주일 미국대사 라엄 이매뉴얼까지 블루리본을 착용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회담은 역사를 바꿨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만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외무성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수십 년간 적대 관계가 이 사건의 배경이 됐다"며 "유감스럽고 솔직히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조사 중이던 13명에 대해 4명 생존, 8명 사망, 1명 입국 확인 불가라고 통보했다. 같은 날 서명된 평양 선언에서 북한은 "일본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현안 문제"에 대해재발 방지 조치를 약속했다. 북한은 책임자 처벌도 발표했다.
장봉림은 사형, 김성철은 15년형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특수기관 일부가 망동주의, 영웅주의에 빠져 저지른 일"이라고 설명했다. 10월 15일, 24년 만의 귀환이 이뤄졌다. 5명의 납치 피해자가 일본으로 돌아왔다. 하네다 공항에 내린 이들의 모습은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귀환자는 지무라 야스시, 지무라 후키에(구 하마모토), 하스이케 가오루, 하스이케 유키코(구 오쿠도), 소가 히토미였다.
모두 1978년7~8월 납치됐던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임시 귀국 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10월 24일 여론에 밀려 귀환자들을 일본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다.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귀국은 더 오래 걸렸다. 2004년 5월 22일 고이즈미의 두 번째 평양방문 당일, 지무라와 하스이케 부부의 자녀 5명이 귀국했다. 소가 히토미의 가족(미군 탈영병찰스 젠킨스와 딸 2명)은 7월 18일에야 일본에 도착했다.
젠킨스는 탈영 혐의 때문에 입국을주저했지만, 결국 11월 미군 법정에서 30일형을 받고 풀려나 사도섬에서 가족과 재결합했다. 그들의 귀국은 일본 열도를 기쁨과 희망으로 물들였지만, 그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영구귀국을 결정하면서, 북한은 남은 피해자들이 전원 사망하였다고 통보하였다. /김현중(연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