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둘러싸고 한미 입장 첨예하게 맞서
- 韓, 환율 급등 우려로 '안전장치' 마련 나섰지만 현실성 낮아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최근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협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지만 '빈손'으로 귀국했다. 미국 뉴욕에서 이뤄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의 회담이 양측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끝난 것이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서 일방적 요구를 하는 미국과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결정은 하지 않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미국에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을 요청했다. 대규모 대미 투자에 따른 외환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통화 스와프는 자국의 화폐를 상대국에 맡긴 뒤 미리 정한 환율로 상대국의 통화를 빌려오는 일종의 '국가간 마이너스 통장'이다.
양국은 지난 7월 미국이 한국에 부과키로 한 25%의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총 3500억 달러(약 48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세부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현금 직접 투자 비중을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를 경우 거액의 달러가 국내에서 빠져나가며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우려가 있다. 지난달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63억 달러 수준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제한 통화 스와프가 체결된다면 환율 급변 등 시장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 김정관 장관은 지난 1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양자간 협의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며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앞서 김정관 장관은 지난 12일 러트닉 장관과 만나 이미 합의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관련한 논의를 시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쟁점은 관세 인하와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대미 투자의 구조와 방식, 이익 귀속 등으로 좁혀진다. 미국은 앞서 합의문에 서명한 일본을 예로 들며 ‘달러 직접 투자로 미국이 지정한 곳에, 이익의 90%는 미국에’라는 관점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국익을 지키는 선에서 협상한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왜 미국 방문에서 관세 합의문에 서명을 못했냐고 하는데, 이번 방미는 우리가 뭔가를 얻으러 간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의 일방적 관세 증액에 최대한의 방어를 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한미는 대미 투자에 있어 입장이 판이하다. 미국은 한국이 3500억 달러를 특수목적법인(SPC)에 직접 채워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최대한 낮추고, 정부 보증으로 채우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준기축통화국인 데다 달러/엔 통화 스와프도 무제한 가능해 대량 달러 유출로 인한 외환위기 가능성이 낮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투자 대상 선정도 자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미국과 투자 참여 기업이 사업성 검토를 거쳐 할 일이라는 한국의 입장 차이가 크다. 투자 후 이익 배분에서도 미국은 ‘투자 원금 회수 이전 반·반, 이후 미국이 90%’로 명시된 일본과의 합의문을 거론하며 이에 준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미국의 요구가 바뀌지 않는 이상 후속 협의는 상당 기간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 관세협상이 '난기류'를 만난 것이다.
일각에서는 오는 23일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는 제80차 유엔 총회가 한미 관세협상의 교착 상태를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2차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톱-다운식' 해법을 기대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과 유럽의 사례에서 보듯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 개념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더한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재명 정부가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요청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통화 스와프 체결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에서 미국의 직접 투자 압박에 대응한 '협상 카드'에 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미 양국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등 위기 상황에 한해 총 2번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적이 있다./정구영 기자 cgy@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