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 방송도 북중 정상 먼저 촬영…"높아진 北 국격 의미"
- "북중러, 반미 공통분모…연합 아닌 '편의의 축'일지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서 받은 의전은 역대 북한 지도자들 중 최고급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행사 내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왼편에 서 있었다. 심지어 중국 방송도 각국 정상들이 모인 톈안먼 망루를 찍을 때 다른 장면이 아닌,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의 대화 장면을 제일 먼저 촬영해 내보냈다.
이는 66년 전인 1959년 열병식 때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중국과 소련의 정상을 만났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은 본인 오른쪽에 호찌민(胡志明) 베트남 국가주석, 왼쪽엔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를 배석시켰다. 김일성 주석은 호찌민, 미하일 수슬로프 소련 외무위원장,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국무원 총리 다음인 마오쩌둥의 오른쪽에서 4번째 자리에 서 있었다.
국가 정상들의 움직임은 대내외에 주는 정치적 이미지와 메시지를 고려해 치밀하게 연출된다. 올해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받은 이 같은 의전은 시진핑 주석이 과거에 비해 북한의 국격을 높이 평가하고, 냉전 시대의 혈맹 관계를 재확인하며, 북한을 이른바 ‘북중러 3국 반미연합’의 전위대로 활용해 미국을 압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북한 정상이 핵보유국인 중국, 러시아 정상과 같은 자리에 선 모습을 보임으로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묵인하는 제스처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미국 전문가들 역시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중러 정상들과의 관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대미 협상력을 강화함에 따라 향후 비핵화 협상 전망이 더 어두워졌다고 진단했다.
시드 사일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고문은 "김정은 위원장은 외교 형세가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우호적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한 번에 한 국가씩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사일러 선임고문은 "중국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존중' 또는 '이해'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러시아만큼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은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상석을 제공함으로써 북한과 비핵화를 논의하지 않고도 관계를 진전시킬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관측했다.
엘런 김 한미경제연구소(KEI) 학술국장은 "이 회동은 향후 비핵화 대화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 중국 정상 옆에 서서 북한이 이들 국가와 나란히 핵보유국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다시 보낸다"고 말했다.
김 학술국장은 "이재명 대통령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지 일주일만에 북중러 정상이 만나 한미일 대(對) 북중러라는 전략적 형세를 구축함으로써 역내에 새로운 냉전 역학구도가 생겼다는 신호도 보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북중러의 공개적인 3자 연대 과시는 미국에 매우 나쁜 소식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관세가 동맹 및 파트너와의 관계를 상당히 약화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덧붙였다.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김정은 위원장의 열병식 참석 목적은 시진핑과 관계를 강화하고, 푸틴과 관계를 재확인하며, 다른 반미 독재 국가들과 공조하는 것이다. 북중러 3국 정상의 회동은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비핵화 합의를 하든 중국과 러시아의 참여와 인정이 필요할 것임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여 석좌는 “김정은 위원장은 푸틴과 시진핑을 만남으로써 국제적 정당성을 강화하고 더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이는 특히 트럼프와 만날 때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마이클 라스카 싱가포르 난양공대 라자라트남 국제연구원(RSIS) 조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 및 푸틴 대통령과 함께 선 것은 북한이 고립되지 않았고, 반미 블록의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강력한 우방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 북한 내에서 (체제)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미국, 한국, 일본에는 북한이 더 큰 (지정학적) 경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고 분석했다.
라스카 조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의 첫 다자 외교 행사는 수년간의 대북제재, 코로나19로 인한 고립, 경제적 난관을 겪은 이후 자신감 회복을 보여준다"면서 "북중러 정상이 함께 등장한 것은 3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협력하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보내며, 김정은 위원장은 이 협력 관계를 자신의 권한과 협상력을 강화하는 지렛대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 랩슨 전 주한미국 대사대리는 "중국과 긴장된 관계 회복에 도움 되고, 트럼프 대통령 집권 하의 미국과 문제가 있는 여러 국가와의 관계에서 북한의 지위를 개선할 수도 있다. 또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 재개 여부를 고려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을 상대로 한 협상력을 강화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해도 3국은 당장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협력할 뿐이지 그 관계가 지속 가능하거나 동맹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랩슨 전 대사대리는 "사진은 눈길을 끌지만 북중러는 아직 통일된 블록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중러 각 국가와 '협상'을 하려고 관여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회주의적 행사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라스카 조교수도 "계산된 지정학적 권력 게임"이라면서 "우리가 본 것은 공식 동맹이 아니라 반미라는 공통분모에서 탄생한 편의의 축"이라고 말했다./이동훈 기자 ldh@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