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신문 1면에 방중 보도, 2면에선 1978년 독자 노선 회고
- 중러에 휘둘리지 않는 주도권 확보 함께 경제난 '해법' 모색

북한의 자주 노선을 상징하는 주체사상탑./이미지게이티
북한의 자주 노선을 상징하는 주체사상탑./이미지게이티

북한이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 사실을 노동신문 1면을 통해 주민들에게 공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에 따라 내달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노동신문은 1면 제호 아래 상자 기사로 이 소식을 전하며 2면에는 1978년 국제질서 격변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구호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를 장황히 되짚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첫 다자외교 무대 등장을 앞둔 상황에서 외교 노선을 분명히 하고, 내부 민심을 다잡으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해외 일정을 대외 발표 직후 곧바로 주민들에게 알린 것은 이례적이다. 통상적으로 최고지도자의 동향은 철저히 통제돼 왔다. 이번에는 북중관계 복원을 통한 북·중·러 연대 과시와 함께 경제난 타개에 대한 기대감을 내부에 심어주려는 계산이 엿보인다.

노동신문은 이날 2면에 게제한 '성스러운 우리 당역사의 갈피에서: 우리 인민의 자주적 신념을 굳건히 해준 혁명적 구호' 기사를 통해 1978년을 ‘격동의 국제정세 속 해법을 모색한 시기’로 규정했다.

노동신문은 북한의 핵심 정치 구호 가운데 하나인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가 처음 제시된 시점이 1978년 12월 25일이라고 밝혔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책임일군협의회에서 복잡한 국제정세 속 북한이 걸어가야 할 전략 노선을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로 천명했다.

노동신문은 당시 '우리 식대로' 구호가 나온 배경에 대해 '1970년대 후반 북한이 제2차 7개년 계획을 추진했지만 경제 건설은 순탄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대북 압박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고, 내부적으로는 경제난이 심화되며 체제 운영에 어려움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는 대북제재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이 경제발전 5개년의 마지막 해인 올해 평양시 5만 세대 살림집 건설, 지방경제발전 20X10 정책, 농촌진흥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현재의 상황과 유사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의 배경에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이 지목되는 이유다. 

북한 경제 상황을 보면 내부 환율은 지난해 대비 세 배, 쌀값은 두 배 이상 뛰었다. 러시아와의 밀착으로 일부 군사기술과 무기는 확보했지만 주민 생활과 직결된 민생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식량·에너지·무역에서 숨통을 트려는 의도가 드러났다. 

노동신문은 또 1978년의 상황이 제국주의와 지배주의 세력의 간섭, 냉전 충돌이 겹치며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제국주의는 미국, 지배주의 세력은 당시 중국과 소련을 의미한다. 

1978년은 미국과 중국이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고(12월 15일), 중국이 개혁·개방을 공식화한 해였다.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구호는 미중 수교 열흘 만에 나온 것이다. 동시에 당시 소련과 북한 관계는 불신이 깊어졌고, 제3세계에서 냉전 갈등이 확산됐다.

북한은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에 직면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이를 돌파할 정치적 선언으로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를 제시했다. 이는 중국식·소련식 사회주의를 모두 부정하고 북한만의 독자 노선을 천명한 선언이었다.

북한이 복잡한 국제질서의 변동 속에 추진되는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을 앞두고 1978년의 독자 외교노선을 소환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러와 협력은 하겠지만 외교무대에서 독자적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미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정세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미 정상회담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북한으로서는 ‘한미의 손길을 거부한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외교 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중국 전승절 참석을 통해 북·중·러 연대를 강조하는 동시에,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접점을 넓혀 외교적 고립을 완화하려는 의도 역시 포함된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에서 이번 전승절 참석을 통해 중러의 확실한 지지를 받아 향후 대미 외교 재개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변수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과거에도 해외 행사 참석 결정을 번복한 사례가 있었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015년 러시아 전승절에도 초청을 받았지만, 의전 문제를 이유로 불참한 바 있다. 당시 북한은 국빈급 대우를 요구했지만 다자 외교무대에서 여러 정상 중 한 명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판단에 발길을 돌렸다. 의전 문제나 돌발 변수로 이번 방중이 무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북한이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을 통해 중러로부터 ‘핵보유국’ 지위를 공식 인정받으려는 계산을 할 수 있지만, 이는 중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한미일중러 지도자들이 만날 가능성이 크고,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간 만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향후 각국의 국익을 위한 복잡한 외교전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은 2019년 이후 6년 만의 첫 해외 무대이자 다자외교 데뷔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제난 속 주민들은 중국을 통한 지원과 개방 확대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노동신문이 동시에 ‘우리 식’ 구호를 상기시킨 것은 대외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개혁개방이나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정책은 배제할 것이며, 폐쇄적 노선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김재천 서강대 교수는 "결국 김정은의 방중은 체제 결속을 우선시하면서도 외교적 공간을 넓히려는 복합적 행보"라며 "김정은의 방중 이후 한반도 외교안보 지형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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