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고개 드는 ‘제한 핵전쟁’의 그림자
북한은 이미 국가 핵전략을 법제화하며 한국에 대한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천명했다. 이는 단순한 공갈이 아니라, 한국군의 공세적 대응을 구조적으로 제약하려는 전략적 계산이다. 한국군은 재래식 전력으로 충분히 북한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북한이 실제로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전쟁 양상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식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냉전 시기 미국 역시 소련과 중국의 핵위협 속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다. 특히 닉슨과 포드 행정부(1969–1977)는 기존의 상호확증파괴(MAD) 논리만으로는 억제의 신뢰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제한 핵전쟁(Limited Nuclear War)이라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흥미롭게도 이 전략은 오늘날 북한의 핵전략과 한국의 대응책을 이해하는 데 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닉슨·포드 행정부의 제한 핵전쟁 구상과 제도화
닉슨 행정부 출범 당시 미국은 복잡한 핵안보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전력을 급격히 증강했고, 중국도 핵보유국으로 부상했다. 단순히 “전면 핵보복”만 위협하는 상호확증파괴 전략으로는 위기 국면에서 실질적인 억제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에 따라 닉슨 행정부는 핵옵션의 다양화를 모색했다. 1974년 국가안보결정각서(NSDM-242)는 그 전환점을 보여주는 문서였다. 핵심은 전면 핵전쟁 이전 단계에서 신속히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제한적 핵옵션(Limited Nuclear Options, LNOs)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는 이 전략을 설명하면서 “도시가 파괴되기 전에 결론을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동시에 “부수적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취약 목표와 중요 목표 모두를 타격할 수 있는 폭넓은 옵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특정 군사시설·지휘통제체계·산업기반을 제한적으로 타격하여 상대방을 협상 국면으로 끌어내려는 구상이었다.
이는 사실상 “유연반응전략의 핵버전”이었다. 미국은 재래식 전력과 전술핵을 연동해 NATO 유럽 방위에 적용하듯, 대전략 차원에서도 제한적 핵전쟁 시나리오를 상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정밀 타격한 이른바 “한밤의 망치 작전(Operation Midnight Hammer)”은 제한적 군사행동이 전략적 억제와 협상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포드 대통령 시기에도 이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 핵전략 기획 체계(Nuclear Options Planning)가 발전하면서, 기존 단일통합작전계획(SIOP)에 제한적 옵션이 실제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작전계획의 일부로서 “위기별 맞춤형 핵사용 옵션”을 제공하려는 시도였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협상을 추진했다. 한쪽에서는 군비 제한을 논의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제한 핵전쟁 옵션을 강화한 것은 아이러니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전략적 이중성-억제와 대화, 압박과 협상의 병행-을 잘 보여준다.
제한 핵전쟁의 핵심 특징과 논란
닉슨·포드 행정부의 제한 핵전쟁 전략은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
첫째, 억지력의 신뢰성 강화다. 단순히 전면 핵전쟁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단계적 옵션을 제시함으로써 억지의 설득력을 높였다.
둘째, 정치·심리적 신호 효과다. 제한적 옵션을 보유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미국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 협상 압박 효과를 기대했다.
셋째, 핵사용 문턱의 하락이다. 그러나 제한핵전은 핵무기의 실질적 사용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오히려 전면핵전으로 비화할 위험을 내포했다. “한 번 핵이 사용되면 제한은 무의미해진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한국 핵안보에 주는 교훈
오늘날 한국의 안보 현실은 냉전기 미국이 직면했던 고민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첫째, 확장 핵억제의 신뢰성 문제다. 북한은 헌법과 법률을 통해 핵선제공격 가능성을 명시하며 한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설령 한국군이 재래식 전력으로 북한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핵 사용 위협은 곧바로 미국의 확장억제 신뢰성 문제로 이어진다. 닉슨·포드 시기 미국이 제한 핵전쟁 전략을 구상한 것도, 동맹국들이 “미국이 정말 핵을 사용할까?”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 역시 똑같은 불안을 안고 있다.
둘째, 재래식-핵 연동의 필요성이다. 북한은 재래식 전력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핵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따라서 한국이 재래식 전력만으로 억제를 장담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한 핵전쟁 개념이 주는 교훈은 바로 재래식 억제와 핵 억제를 다층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미국과 협력해 북한이 전면 핵전쟁을 결코 감수할 수 없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맞춤형 억제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셋째, 정치적·심리적 신호의 중요성이다. 제한 핵전쟁 전략은 단순한 군사옵션이 아니라,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신호였다. 미국은 제한적 핵옵션을 통해 소련을 압박했고, 억제를 강화했다. 한국 역시 북한에 대해 “도발은 곧 체제 생존을 위협하는 대가로 돌아온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확장억제와 더불어 한국 스스로의 핵자강, 즉 핵잠재력 확보와 함께 핵무장 능력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한 핵전쟁’ 전략 속에 담긴 핵억제의 본질
닉슨과 포드 행정부의 제한 핵전쟁 전략은 단순한 군사구상이 아니라, 억제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실험이었다. 전면 핵보복이라는 추상적 위협만으로는 억제가 불가능하다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옵션을 제도화함으로써 동맹국 방어를 담보하려 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도 북한의 핵위협 앞에서 그와 같은 현실 앞에 서 있다.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 재래식 전력의 한계, 그리고 북한 핵사용 가능성이 억지의 신뢰성에 미치는 압박은 닉슨·포드 시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그렇기에 한국이 취해야 할 길 역시 분명하다. 재래식과 핵 억제를 결합한 다층적 구조, 맞춤형 억제 전략의 구체화, 그리고 정치·심리적 신호의 강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결국 한국의 핵자강이다.
**저자 소개**
정한용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대우교수는 전 맹호부대 26여단장(대령) 출신으로, 충남대에서 군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년 넘게 드골 대통령의 전략과 리더십을 연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대한 대한민국의 미래에 드골식 전략과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북핵 시대 남북 핵균형을 통한 군축과 비핵화 가능성을 믿으며, 한국의 핵무장 추진에 헌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핵안보와 리더십 분야에서 4권의 저서와 51편의 글을 샌드타임즈 및 월간군사저널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현재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