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선전은 70년 이상 이어진 ‘체계화 된 세뇌 공작’
- "북한도 나쁘지 않네” 환상 심고 무의식 속 세뇌 가능성

“북한도 생각보다 괜찮은 나라 같아요.” 북한이 제작한 어린이 영상을 본 실향민 2세의 고등학생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북한 자료를 요청했지만, 정작 선전용 영상 몇 편만 본 뒤에는 언론에서 보던 북한의 참혹한 현실과는 너무 다르다며 의구심을 표했다. “인권이 심각하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서울의 한 대학생은 “북한 영상은 처음 보는데 사람들 표정도 밝고, 의외로 살기 좋아 보인다”고 했다. 어느 북한 전문가 여성은 김정은의 얼굴이 나오자 “잘생겼고, 호감형이라 정치를 잘할 것 같다”는 기대감도 드러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최근 정부 일각과 여권에서 북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 등 북한의 관영 선전 매체를 대중에 개방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우리 국민은 충분히 성숙했고, 북한 선전에 쉽게 흔들릴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는 것이 그 논리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안이한 판단이다. 북한의 선전은 70년 이상 이어진 ‘체계화된 세뇌공작’이다. 단순한 미디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2014년 통일부 기자실에 처음 조선중앙TV가 설치됐을 때, 기자들이 15분도 안 돼 자리를 떴다. “1950년대 한국 공보처 방송을 보는 듯하다”는 평가였다. 그때만 해도 조악한 영상미와 경직된 선전구호에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북한의 선전물은 치밀하고 정교해졌으며, 감성적 장치로 시청자의 경계를 허문다.
체제 선전이라는 본질을 교묘하게 감추며 시청자에게 감동과 동질감을 심는 감성 포장은 위험하다. 결국 “북한도 나쁘지 않네”라는 환상을 심고 ‘세뇌’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전에 무장해제되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제3차 남북정상회담과 평양공동선언 당시, 김정은의 서울 방문 소식이 전해지자 종북단체들은 급격히 활동을 재개했다. 백두칭송위원회, 위인맞이환영단, 꽃물결예술단 등은 김정은을 환영하는 문화제와 퍼포먼스를 벌이며 북한 체제를 미화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미국과 보수세력을 ‘반통일 세력’으로 매도하며 여론을 오도하는 선전물도 대량 배포했다.
이 단체들은 이후 남북관계 경색과 함께 자취를 감췄지만, 그 구성원 상당수는 여전히 다른 시민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북한 TV 개방은 이들에게 새로운 무대가 될 수 있다. 북한 체제를 미화하고 김정은을 합리화하는 각종 활동이 ‘문화 교류’라는 탈을 쓰고 재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북한 선전에 가장 취약한 대상이 청소년과 2030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북한의 실상을 체험하지 않았고, 이념적 경계도 약하다. 영상 하나, 캐릭터 하나에 쉽게 매료된다. 단순한 호기심이 동정심으로 바뀌고, 다시 동경으로 이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귀스타브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군중은 비판과 분별력이 없으며, 보여지는 이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상상력에 근거해 판단한다”고 했다. 특히 통일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아무런 비판 없이 북한의 선전물을 노출시킬 경우, 독재와 민주주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민족 감성에 사로잡혀 북한을 무조건 옹호하는 무비판적 인간으로 세뇌될 위험이 있다.
일각에서는 독일 통일 당시 동서독 간 언론 교류를 사례로 든다. 그러나 독일은 2차대 전후 민족 간 전쟁을 겪은 적이 없었고, 동독은 서독 특파원의 상주 취재를 허용했으며 서신 교환과 전화 통화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반면 북한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적대 국가’로 간주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언론의 상주를 허용하면서도 한국 언론의 평양 상주는 철저히 막고 있다.
이는 한국 언론의 영향력이 북한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이 우리 문화를 ‘반동사상’으로 규정해 처벌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북한의 선전 매체를 일방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북한 TV의 일반 개방은 단순한 문화 교류가 아니다. 독재 체제의 포장된 얼굴을 우리의 안방에 들이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 있다’고 말해도, 반복 노출과 감정적 공감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대한민국이 ‘가마솥 속 개구리’처럼 뜨거운 물에 적응해가는 길일 수도 있다. 냉정한 인식과 이성적 거리가 필요한 때다. 북한 TV 개방, 지금은 아니다. /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