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지배한 유럽 강국이었다. 그 후 주변국과의 전쟁 패배로 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러나 제1·2차 세계대전 시에는 강력한 군사력건설과 결사항전 의지 과시로 중립을 유지하여 전쟁 참화를 막을 수 있었다.
스웨덴은 인구 980만 명, 국토넓이 45만Km²(한반도 2배), 개인 국민소득 58,000달러 수준의 부국(富國)이다. 현재 상비군은 23,600명이며 예비군 31,300명을 유지한다. 특히 스웨덴은 6․25전쟁 당시 170명의 의료지원부대를 한국에 파병하였으며, 연 참전 인원은 1,124명에 달했다.

▶히틀러 야심을 와해시킨 스웨덴 중립정책
1940년 4월, 히틀러는 일순간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손에 넣고자 하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노르웨이 연안은 전략물자를 선적한 독일 화물선이 출발하는 항구들이 많았다. 히틀러는 중립을 선언한 스웨덴에게 독일군의 자유로운 영토통과 권한을 요구했다.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정부는 히틀러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1940년대 국방예산을 평시보다 10배로 늘렸고, 상비군을 1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대폭 확충했다. 100만 예비군의 전력보강과 80만 여성을 준군사부대로 편성했다.
당시의 스웨덴 외무장관 크리스찬 귄터는 “독일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힘들도록 ‘고슴도치 전략’을 구사했다. 우리와 싸운다면 얻는 이익보다는 훨씬 더 큰 손해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1943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웨덴은 영토 내의 독일군 활동을 차단했다. 연간 200만 병력이동이 있었던 노르웨이-스웨덴 간 보급로 봉쇄로 히틀러 전쟁계획은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스톡홀름을 지켜온 발트해의 철옹성 요새
깊숙한 내해에 있는 스톡홀름에서 배를 타고 발트해의 먼 바다로 나갔다. 1시간 정도의 항해 끝에 나타난 웅장한 박스홀름(Baxholm)성! 1549년에 건설된 이 성채는 주변 항로통제가 가능한 자라목 지형에 있었다. 30m 높이의 철옹성이 섬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성벽 밖에는 철갑으로 보호된 포탑들이 길게 포신을 내밀고 있다. 오늘날 ‘박스홀름’성채는 군사박물관과 유스호스텔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실에는 요새건립과정, 1․2차 세계전쟁, 스웨덴군 소개 사진들이 있었다. 관리인 로제 에드룬더(Roger Edlund)씨는 해안포병 함정추적병으로 13개월 동안 군복무를 했다. 그는 “스웨덴이 오늘날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노련한 중립외교로 약 100여 년간 전쟁을 피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2차 세계전쟁으로 유럽이 초토화되었을 때, 스웨덴은 끝까지 전화에 휩쓸리지 않았다.”라고 했다.

▶동물 세계와 비교한 인류의 전쟁역사
스톡홀름 중심부의 육군 군사박물관은 수백 년 전의 대포공장을 개조한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이 박물관은 스웨덴 전쟁역사와 “왜 인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는가?”를 동물 세계의 투쟁 과정을 제시하면서 설명하고 있었다. 즉 한 무리의 침팬지들이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진과 발굴된 원시인 집단유골 사진이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사진은 인류 전쟁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침팬지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種)이다. 이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자신들의 영역확장을 위해 절친했던 동료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인류 역사도 침팬지 투쟁 과정과 너무도 유사하다. 웅덩이 안의 인간 유골들은 약 13,0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이다. 주로 돌도끼나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농경사회 정착으로 의식주가 해결된 이후에도 전쟁횟수는 크게 늘어났다.”라고.


▶ 전쟁 참화를 막은 중립 외교정책
박물관 3층에는 아슬하게 추진했던 스웨덴 중립정책 자료들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즉각 중립을 선언했고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1939년 말, 핀란드소련의 전쟁으로 이 정책은 곧 시험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스웨덴 청년들이 핀란드군에 합류했고, 시민들은 많은 물자를 원조했다.
그러나 연합국의 스웨덴 영토를 통한 핀란드 병력지원을 정부는 거절하였다. 주변국들이 전쟁에 휩싸이자, 전 국민은 자위력 강화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시민들은 개인차량을 비행장활주로 가운데 주차하여 적 공수부대 착륙을 거부했고, 트럭공장은 탱크를, 성냥공장은 탄약을 생산했다. 스웨덴은 이 무기를 자주국방에만 쓸 것이라고 대내외에 공포했다.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무기생산 역사 코너가 있었다. 1800년대부터 군수산업을 발전시켜온 스웨덴은 1940년대 폭격기를 자체 생산할 정도로 무기개발에 국가역량을 집중해 왔다.

오늘날 주요 방산품 수출국인 스웨덴은 첨단기술이 적용된 그리펜(Gripen)전투기, 잠수함, 항공정찰장비 등을 수출하고 있다. 또한, 스웨덴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의료부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와 협력하여 서울에 ‘국립중앙의료원'을 건립했다. 이 병원은 전쟁 폐허 속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우리나라 환자들을 돌보다가, 1968년 한국 정부가 인수하여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

▶1910년대 스웨덴은 대형전함·잠수함 확보
시내 중심부에 약간 떨어진 해변에는 해군박물관이 있다. 전시실에는 중세부터 오늘날까지의 스웨덴 해군역사가 펼쳐져 있다. 18세기경 발트해의 패권을 두고 스웨덴·영국·러시아 간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시 파워(Sea Power)'의 중요성을 깨달은 스웨덴은 1910년대 이미 10여 대의 수상항공기를 탑재한 대형전함과 잠수함까지 확보했다.
또한, 스웨덴은 우수한 해군 인력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전통적으로 국가 차원의 관심을 가졌다. 즉 선발된 어린 소년들을 체계적인 함상 훈련을 통해 해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아울러 스웨덴은 국익 창출의 기여도, 열악한 함상 생활여건 등을 고려해서 이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다니엘 사레톡(Daniel Saretok)은 당당한 체격에 말쑥한 제복을 입은 스웨덴군 해사생도였다. 그의 태도에서 사관생도의 긍지가 넘쳐 흘렸다.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회 친구들이 때로는 부럽지만 생도 생활도 재미있다. 생도대 생활은 엄격하지만 일과 후에는 외출도 허용된다. 스웨덴의 대재벌 ‘발렌베리’가(家) 후손들은 전통적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모험·담력·책임감을 키우는 데는 사관학교만큼 좋은 곳은 없다. 더구나 졸업 후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라고 했다.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