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2차 핵 타격 능력 갖추면 美, 韓 위해 선제 공격 안 나서"
- "韓 핵을 갖겠다고 하면 일본, 대만 움직이고 중국 두려워해"
- “외교는 ‘답 정해진 문제풀이’ 아냐… 국익 따라 유연하게 ”
- “안미경중 더 이상 안돼 ...“중국과의 경제 기대 환상 버려야”

이백순 전 호주 대사가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법무법인 율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샌드타임즈 
이백순 전 호주 대사가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법무법인 율촌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샌드타임즈 

“북한이 2차 핵 타격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은 한국을 위해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백순 전 주호주 대사는 지난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법무법인 율촌 사무실에서 진행한 샌드타임즈 인터뷰에서 "미국의 핵우산만 믿고 우리의 생존을 맡기는 것은 더 이상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라며 이 같이 말했다. 

35년간 외교부에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이 전 대사는 현재 법무법인 율촌에서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최근 외교 현장의 고민을 담은 신간 '격변기, 외교의 새 길 찾기'를 출간했다. 

대한민국의 국운과 외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또 심각한 북핵 위기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백순 전 대사의 견해를 들었다. 

- "北 2차 핵 타격 능력 갖추면 美, 한국 위해 선제 공격 나서지 않을 것"

이 전 대사는 북한이 2차 핵 타격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은 한국을 위해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미국이 한 번이라도 직접 보복한 적 있습니까? 푸에블로 납치, EC-121 격추, 판문점 도끼 만행… 단 한 번도 무력 대응은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을 위해 북한을 선제 타격한다는 건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는 수준"이라며 "그동안의 실증적 사례를 보면 그런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EMP(전자기 펄스)만 터뜨려도 우리는 디지털 사회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며 "핵 앞에서 무력한 재래식 억제력으로는 우리의 존립을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로 막을 수 없는 절대무기로서 미국의 핵우산만 믿고 우리의 생존을 맡기는 것은 더 이상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한국 핵을 갖겠다고 하면 일본, 대만 움직이고 중국이 두려워해"

이 전 대사는 그동안 한국이 북핵 문제의 ‘주체’가 아니라 ‘관찰자’처럼 행동해왔다는 점도 지적했다.

“북한에게 핵 포기를 설득해달라고 중국에 계속 말로만 부탁하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중국이 왜 자기 전략 자산인 북한의 핵을 굳이 제거하려 하겠습니까?” 

그는 오히려 한국이 핵무장 능력을 갖추고 ‘전략적 전환점’을 만들 경우 중국이 동북아의 핵 도미노 확산을 우려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이 핵을 갖겠다고 하면 일본과 대만도 움직입니다. 중국은 이걸 제일 두려워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외교의 시작점입니다.”

북한의 핵 무기 위협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 내부에서도 핵 자강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통일연구원 등 주요 국책기관의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70% 가까이가 “한국도 자체 핵무장을 검토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러 밀착으로 한반도에 엄중한 군사 위기 다가와  ... 한반도에 드리운 ‘이중 냉전’ 그림자

이 전 대사는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 협력이 가속화되며 한반도 안보에 엄중한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 기술 협력을 통해 ICBM 재진입체 기술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핵 선제타격 가능성’을 스스로 선언하면서 그 위협은 더 이상 허상이 아닌 ‘액면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것이 이 전 대사의 분석이다. 

“북한은 과거의 블러핑(허세)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이 말한 정책은 대부분 실현해 왔습니다. 핵무장도, 군사노선 전환도 다 그렇게 이루어졌어요. 이젠 핵 선제공격 발언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러시아가 북한에 재래식 전력의 핵심 기술을 이전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이 급속히 정비되고 있다는 점도 도 우려했다. 

“과거 북한은 재래식 전력이 부족해서 핵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러시아가 부족한 군사기술을 코치해 주면서 북한의 재래식 무기도 질적으로 상승하고 있어요. 남한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불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흐름을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표현으로 규정했다. “북한의 핵+재래식 전력이 동시에 고도화되면 한국의 억지력은 한없이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 대사는 한반도가 여전히 구냉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며 이제는 신냉전까지 겹쳐져 있다고 진단했다.

“남북 간 이념 대결(구냉전)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젠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신냉전 구도가 함께 엎어졌습니다. 이중 냉전의 최전선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이는 북·러·중의 ‘북방 삼각 안보 협력’이 강화되는 동시에 한·미·일 삼각 협력의 경계선이 분명해지면서 한반도가 군사적 블록의 최전선 충돌지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현실화 될 가능성 높아져

이 전 대사는 이스라엘-이란의 미사일 전쟁을 사례로 들며 한국의 미사일 방어체계의 치명적 허점을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1,500km 떨어진 이란의 공격에도 아이언돔, 데이비드슬링, 애로우 등 3중 방어망이 작동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오면 3분도 안 걸립니다. 실제로는 1~2분 안에 수도권 상공에 도달합니다.” 

그는 이어 현재의 사드 배치는 대부분 주한미군 기지 방어용이며 수도권 방어는 사실상 공백 상태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현실적으로 보면 지금 서울은 아이언돔도 없고 중·상층 방어망도 없습니다. 북한이 다수의 중거리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하면 수도권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예전엔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 만들겠다고 하면 웃어넘겼죠. 이제는 다릅니다. 저는 그게 현실화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북한의 핵무기체계 고도화뿐 아니라 군사 전략 자체가 선제공격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장기 집권과 러시아·중국과의 전략 협력이 결합되면서 북한의 도발 임계점이 낮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외교 이제는 ‘맷집’이 필요하다”... 중국의 경제보복 버텨낸 호주의 뚝심 외교

이 전 대사는 대중외교에서 호주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외교의 참고 모델로 제시했다. 중국의 경제 보복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뚝심 있게 버텨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고,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노선은 유지됐습니다. 우리 외교도 정권과 무관한 일관성과 맷집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핵무장에 대해 일치된 반대 입장을 보이는 한국 정치권의 ‘이상한 합의’도 지적하며, 이제는 주체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 문제를 우리 시각으로 보지 않고 늘 외부 시선을 따라가면 북핵도, 통일도, 외교도 다 남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이제는 한국이 주도권을 회복할 때입니다.”

이 전 대사는 “5년 정권에 얽매인 이벤트성 외교는 무의미하다”고 단언한다. 외교 전략은 단기 성과보다 10년 이상의 일관성과 억제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쇼와 성과 중심의 외교로는 북한의 도발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억제는 신뢰와 지속의 산물입니다. 외교의 기본부터 다시 세워야 합니다.”

“벼랑 끝 외교·살라미 외교, 한국이 원조였다”… 대형 외교 구상 실종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이 벼랑 끝 외교의 원조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살라미 외교의 창시자입니다.”

이백순 전 대사는 지난 정권과 현 정부를 통틀어 한국 외교의 '스케일 축소' 현상을 우려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의 북방외교 이후 한국 외교가 더 이상 대형 전략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벼랑 끝에서 받아냈고, 박정희는 월남 파병을 지렛대 삼아 미국 원조를 끌어냈습니다. 노태우의 북방외교도 마찬가지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이 정도의 전략적 구상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는 최근 수십 년간의 한국 외교를 평가하면 '계산기는 잘 두드리지만, 목표가 작고 전략이 없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규모 국익 협상보다는 실무적 관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국에 ‘100억 달러 내놔라’고 밀어붙일 수 있었어요. 지금은 외교부도, 청와대도 그렇게 못 합니다. 오히려 북한이 지금 우리 외교를 더 잘 흉내 내고 있어요. 벼랑 끝 전술도, 살라미처럼 잘게 잘라 던지는 협상술도 다 북한이 써먹고 있습니다.”

이 전 대사는 보수 정권의 외교 노선도 오해와 착각 위에 있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이승만, 박정희를 ‘친미 대통령’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니에요. 그분들은 미국과 맞서 싸워서 우리 국익을 챙긴 외교 전략가였습니다. 지금 보수는 그냥 미국 말을 잘 들으면 보수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동맹 중독’입니다.”

그는 ‘동맹파’ 일색인 외교부 문화가 창의성과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외교부가 스스로 전략을 짜기보다는 청와대에서 하달되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행정조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전 대사는 한국 외교의 축소 배경에 대해 세 가지 구조적 문제를 리더십 부재, 청와대 집중,  바텀업 실종으로 꼽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판을 짜는 외교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는 계산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외교가 있어야 국가가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 외교는 눈앞 이슈에만 반응하고 전략은 실종됐습니다. 과거를 회상하자는 게 아니라, 그 스케일과 기질을 되찾자는 겁니다.”

“안미경중 외교는 가랭이 찢어지는 외교” ... “중국과의 경제 관계? 환상은 버려야”

“더 이상은 안미경중(安美經中) 외교로 안됩니다." 

이백순 전 대사는 오늘날 외교 지형의 복잡성을 설명하면서 익숙한 외교 전략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일명 ‘안미경중’ 노선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붙어 있을 때는 펜스 위에 양발 걸쳐도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담장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계속 걸치고 있으면 가랭이 찢어지거나 떨어집니다.”

이 전 대사는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은 여전히 과거의 관성으로 외교를 이야기한다”며 정태적 사고의 위험성을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 전 대사는 단순한 편가르기식 외교 역시 경계했다.

“그렇다고 당장 한쪽만 골라서 완전히 붙어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외교는 스위치 켜듯 온-오프 하는 게 아니라 압력밸브 조절처럼 균형을 정밀하게 잡아가는 복잡계입니다.”

그는 외교 전략을 화학공장에 비유하며 외부 압력과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밸브를 돌려가듯 유연하고 세밀한 국익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국익에 유리한지 판단은 가능하지만 그 기울임조차도 정교하게 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걸 자꾸 흑백논리로 접근하면 외교를 망칩니다.”

특히 그는 여전히 ‘중국경제론’을 주장하는 국내 학계와 일부 관료 사회를 향해 경제 현실 인식이 낡았다고 지적했다.

“중국 시장은 크니까 경중해야 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물어봤어요. 앞으로 5년 뒤, 한국이 중국에 계속 팔 수 있는 게 뭐냐? 그랬더니 ‘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뷰티’ 뭐 다섯 개 이야기하더군요. 그중에 제가 보기엔 뷰티 하나 남을까 말까 합니다.”

그는 “실제 이미 무역 적자가 시작된 지 3년이 지났다”며 중국의 산업 고도화와 보호주의 성장 둔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의 대중 수출 기반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전 대사는 지금 필요한 것은 ‘실용외교’이지만 그 실용이 단순한 중도주의나 회피적 모호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실용외교를 정태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건 다이내믹한 국제 질서 속에서 능동적으로 조율해나가는 전략입니다. 과거의 문법으로 과거의 성공 경험으로 현재를 보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실용은 실종되고, 국익은 흔들립니다.”

“외교는 ‘답 정해놓고 하는 문제풀이’ 아니다… 국익 따라 유연하게 가야”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실용외교'가 새 국정 외교 전략으로 제시되며 언론과 전문가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전 대사는 “지나치게 성급한 평가와 언론의 단순화”를 경계했다.

“지금 이 정부 출범한 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외교 정책이라는 건 단기간에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언론은 회의 참석 여부만 가지고 ‘실용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더군요. 실용외교란 회의 참석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얻어오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는 최근 한국이 나토 회의 불참을 두고 논란이 일었던 것을 언급하며 “외교는 쇼가 아니라 협상의 무대”라고 못 박았다.

“가서 상견례만 하고 얻는 게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준비 없이 트럼프를 만나서 뭘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덮어쓰고 오는 수가 있습니다. 젤렌스키가 그랬죠.”

“외교는 국익파다… 자주냐 동맹이냐 정해놓고 하면 안 돼” ... “실용외교의 핵심은 고정관념 깨는 것”

이 전 대사는 “한국 외교는 자주파냐, 동맹파냐 식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며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구도라고 일축했다. 

“외교는 국익파입니다. 국익에 따라 자주를 강조할 수도 있고, 동맹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시기와 환경, 국익이라는 구체적 기준에 따라 전략을 믹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과거 외교부 과장 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일화도 들려줬다.

“기자들이 ‘과장님은 자주파입니까, 동맹파입니까’라고 묻더군요. 저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외교는 시험문제가 아닙니다. 답을 정해놓고 문제 푸는 건 외교가 아닙니다. 상대국은 다 압니다. 저 나라는 ‘정해진 답’으로 움직이는구나.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릅니다.”

최근 위성락 안보실장과 이종석 국정원장 인선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그는 “2003년 자주파–동맹파 논쟁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을 함께 쓴 건 균형외교를 위한 의미 있는 인사”라고 평가했다.

“위 실장은 그때 외교부에서 동맹중시론자, 이종석 원장은 NSC에서 자주중시론자로 활약했죠. 둘을 동시에 기용한 건 이 정부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외교는 좌우 날개를 다 써야 날 수 있는 분야입니다.”

다만 그는 “두 사람의 의견 차이를 정책적 시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협의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균형은 양날개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합할 중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전 대사는 “실용외교의 본질은 유연함과 객관성”이라고 강조했다.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용은 죽습니다. 정권이 어떤 노선을 택하든 중심은 ‘국익’이고, 그 국익은 철저히 객관적 분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는 국익을 “도식화 가능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국익은 수학처럼 수치화는 어렵지만 도식화하면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념과 감정으로 국익을 규정하고 있죠. 정치권도, 언론도, 국민도 국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백순 전 대사는 냉정했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현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데서 비롯된다. 그는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외교가 ‘지켜야 할 마지막 내벽’임을 알고 있다.

“외교는 한 나라의 품격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실용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정권 바뀔 때마다 스윙하는 나라… 아무나 흔드는 나라 된다”

그는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안보 정책이 팬덤처럼 스윙한다”며 “이런 나라는 신뢰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고 지적했다.

“외교는 국가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보여준 건 흔들리기 쉬운 나라의 전형이었어요. 누가 보더라도 압박을 조금만 하면 반응이 오는 나라. 그게 반복되니, 주변국들이 전략적으로 우리를 다뤄보려는 겁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구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인용하며 뼈있는 말을 던졌다.

“그렇게 자주 바꾸면 ‘아무도’가 아니라 ‘누구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됩니다.”

이 전 대사는 “실용주의 외교가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실용 외교의 토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국가 정체성의 확립. 둘째,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셋째, 국익에 대한 객관적 기준 설정입니다.”

그는 특히 ‘국익’이라는 단어의 오남용을 비판했다.

“많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국익을 자신의 이념이나 감성에 맞게 재단합니다. 그러나 국익은 주관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도식화하면 방향이 보입니다. 수학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분석 가능한 기준은 있습니다.”

“89년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는 끝났다, 트럼프 출현은 증상일 뿐”

이 전 대사는 최근 발간한 저서에서 “1989년 냉전 해체 이후 이어진 미국 중심의 단극 질서는 종언을 고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1970년대부터 기울고 있었다.

“닉슨의 금태환 중지, 85년 플라자합의 이 모든 게 미국 경제의 내리막을 예고했다. 미국은 하부 구조는 무너지고 있는데 상부 구조는 여전히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오버페이스했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쇠락을 직감한 미국 대중이 내세운 증상적 인물”이라며 “이 사람은 계획도 전략도 없지만 오히려 바이든 정부보다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그는 “89년 체제는 종언을 고했고, 다극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의 재등장은 이 흐름을 가속화할 수도 혼란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진단은 정확한데 수술하려는 의사가 돌팔이라면 오히려 더 위험하죠. 미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도 있지만, 트럼프식의 감정적 대응은 오히려 쇠락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 여파는 동맹국에게도 치명적일 겁니다.”

“민주화는 교과서로 배우는 게 아니다” ... 미얀마 민주 정부의 실패에서 배우는 교훈

“나는 미얀마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예고했다. 현실이 됐을 뿐이다.”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지낸 그는 2021년 군부 쿠데타로 민주화 정부가 붕괴된 미얀마를 회고하며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사는 2010년대 후반부터 미얀마 정세를 꾸준히 분석해왔다. 2020년 11월, 아웅산 수지의 민주정부 2기가 출범했을 당시부터 그는 “군부가 다시 칼을 빼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 군부는 부정선거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는 대사 재임 당시 아웅산 수지 측 핵심 인사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했다고 밝혔다. “2년 반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다. 민생경제에 집중하고,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기용하라고 했다.” 그는 심지어 그들에게 ‘투두 리스트’(To Do List)와 ‘낫 투두 리스트’(Not To Do List)를 구체적으로 전해줬다.

그러나 민주화 정부는 오히려 정반대로 갔다. “아웅산 수지는 민족 통합, 연방국가 같은 정치적 이상에 집착했다. 그건 아버지의 유업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늪에 빠졌다.”

그는 민주화 정부 인사들의 구성에도 날을 세웠다. “중용된 이들은 대부분 15년, 25년 감옥살이한 사람들이었다. 충성심은 있을지 몰라도 국제감각은 전무했다.” 그는 이들에게 “해외 유학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돌아오고 있으니 이들을 중용하라”고 했지만 외면당했다. 그 이유는 “기득권 출신이라서”였다.

“이념은 민주화지만 사고는 편협했다. 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다.” 이 전 대사가 분석한 미얀마 민주정부의 실패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한국 외교, 정체성·객관성·일관성 3대 기둥 세워야”

이 전 대사는 결국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선 외교가 먼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정체성’, ‘객관성’, ‘일관성’으로 요약된다.

“외교는 상대국이 아니라 우리의 내공으로 결정되는 일입니다. 상대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단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죠.”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외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외부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부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교는 시대의 거울이자 국가의 체온계입니다. 지금 한국은 외교로 자기를 진단해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제는 미중 중심도 아니다. 진짜 다극화의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은 지금 “위기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중간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역사는 순응이 아니라 대비하는 자의 편이다. 세계는 이미 격동기로 들어섰다.” 

‘국익 중심 외교’ 누구나 말은 쉽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말’에 그친다면 외교는 언제든 무력해진다.

이백순 전 대사의 인터뷰는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외교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냉철한 메시지다.

“외교는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감정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 전략입니다.”

그의 발언은 단호했다. 외교관으로서의 절제와 관찰력 뒤에 깊은 좌절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실전의 역사를 직접 겪어본 세대”라는 자긍심도 느껴졌다. 세계가 다시 흔들리는 지금 경험에서 우러난 냉철한 조언은 더욱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인터뷰 정리 = 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

** 이백순 전 대사는 **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수료하였다. 미국 버지니아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수학하고 1985년 외무부에 들어갔으며 안보정책과장 인사기획관, 북미국장을 거쳐 청와대 외교보좌관실 선임 행정관 2회, 주 미얀마, 호주 대사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신세계 질서와 한국', '대변환 시대 한국 외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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