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호화폐는 해킹만으로도 취득 가능한 자산…은밀 거래 용이
- 북한 여건상 매력적인 돈줄…군비ㆍWMD 개발비 재원 조달

북한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들이 있다. 암호화폐 절취와 저장도 그 중 하나다. 북한은 이 분야에서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2월 21일 북한 해커 그룹 ‘라자루스’가 세계 유수의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비트를 공격해 14억6000만 달러(2조 1156억 원)어치의 암호화폐를 절취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금액 대부분은 이더리움이었다. 라자루스가 이 중 상당 부분을 비트코인으로 전환함에 따라 북한의 총 비트코인 보유량은 1만3562BTC(BTC: 비트코인 1개를 세는 단위 표기), 한화로는 약 1조6519억원이 됐다.
세계 비트코인 보유량 순위는 1위 미국(19만8109BTC), 2위 영국(6만1245BTC)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3위로 우뚝 올라섰다. 북한에게 밀린 나라들 중에는 4위인 부탄(1만635BTC), 5위인 엘 살바도르(6117BTC) 등이 있다.
북한 해커 그룹 라자루스의 바이비트 공격은 지난 6일, 즉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략 비트코인 준비금(SBR) 창설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며칠 전 일어났다. 북한이 암호화폐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암호화폐도 '돈'이다. 그것도 북한의 여건상 매우 매력적인 돈줄이 된다. 현재 핵개발로 국제적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은 무역 등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국가 예산, 특히 군비와 WMD(핵과 탄도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비 등 천문학적으로 들어가는 소모성 재원을 조달하기 어렵다. 벌 수 없으면 훔쳐야 한다.
어떤 물리적 실체도 없이 전자적으로만 존재하는 암호화폐는 충분한 기술만 있다면 사이버전으로 공략해 절취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은 세계 굴지의 해킹 강국이다.
게다가 암호화폐에는 기존 법정화폐에는 없는 다양한 태생적 장점이 있다. 송준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암호화폐는 중앙정부의 지시나 감독과는 무관하게 공급이 결정되고, 현금 화폐와 유사할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되며, P2P 거래를 통해 국경을 넘어 빠르고 간편하게 결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익명성과 유동성, 거래 비용 면에서 법정화폐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송 교수는 암호화폐야말로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어 새로운 화폐제도로의 전환을 일으킬 가능성까지도 있다고 본다.
각종 경제 제재에 시달리는 와중에 WMD 개발에 필요한 거래를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눈에 안 띄게 해야 하는 북한에게 이 같은 특징을 지닌 암호화폐는 매우 매력적인 지불 수단이다.
사실 북한이 암호화폐를 탐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근 10년간 암호화폐 절취에 적극 나섰다.
2010년대 중반은 암호화폐 기술이 버블을 일으키고 주류 세계에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에 주목한 북한은 기존 금융권이 아닌 암호화폐 시장으로 사이버전의 촉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암호화폐 시장이 표적이 됐다.
북한이 암호화폐 절취로 얻는 이득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22년 북한은 그 해 경제 규모의 5%에 달하는 금액을 훔친 암호화폐로 충당했다는 것이 해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는 같은 해 북한 국방비의 20%가 좀 못 되는 금액이다.
물론 훔친 암호화폐 중 WMD 개발비로 쓰이는 금액의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다. 하지만 2022년 한 해 동안 북한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각종 미사일 총 90여 발을 발사했다. 1984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탐지하기 시작한 이래 최대 수치였다. 북한 실정으로는 암호화폐 절취 등 불법적인 수단이 없이 이에 드는 막대한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다.
북한의 암호화폐 절취 활동과 탄도미사일 개발 강도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암호화폐 절취 수익 중 상당한 부분이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에 활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강력한 보안 조치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정권 유지용 WMD 개발 재원 확보를 위해 암호화폐 절취에 앞으로도 계속 매달릴 것으로 보인다. /이동훈 기자 ldh@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