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죽음의 구덩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국군 입대
'공부해, 링컨 같은 훌륭한 지도자 돼라'던 미군 초병의 당부

“제가 북한에서부터 여러번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는데 교훈은 한마디로 ‘배움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올해 92세인 김일주 한국지도자아카데미 원장은 매일 오전 첫시간 배달되는 신문을 읽고 중요기사와 사설 내용을 수첩에 꼼꼼히 메모한다. 정치,군사,외교,국제 문제와 관련된 메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그의 수첩은 웬만한 백과사전에 비견될 정도로 두껍다. 이 같은 메모 습관은 6.25 전쟁과 한국 현대사의 거센 풍랑을 겪으며 형성됐다. 대한민국에서 휘문고, 건국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운동가, 정치인,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일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 한국지도자아카데미 사무실에서 김일주 원장을 만났다.
죽음의 구덩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다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인 김일주 원장은 17세 때 6.25 전쟁을 맞이했다. 1950년 가을 고향 단천에서 인민군에 징집됐다가 탈영했지만 얼마 못가 체포됐다. 북한군은 체포된 그를 단천 인근의 야산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 했다.
인민군 징집을 피해 다니다 체포된 청년 수십명과 함께 구덩이를 파던 중 미군 쌕쌕이(전투기)가 날아와 은폐했다. 김일주가 옆을 보니 자신을 감시하던 북한군 특무장(주임원사 격)이 함께 엎드려 있었다.
북한군 특무장이 김일주에게 '담배 있냐'고 물었다. 김일주는 친척이 주머니에 넣어준 담배를 꺼내서 건넸다. 기분이 좋아진 북한군 특무장은 김일주에게 ‘지금 파고 있는 구덩이가 전호가 아니라 죽음의 구덩이’임을 알려주고, '도망가라'고 말했다.
'혹시 도망가게 해 놓고 뒤에서 쏘지 않을가' 잠시 망설였지만 '여기서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무작정 달려 살았다.
국군입대와 머슴살이
그해 10월 국군 3사단이 김일주네 마을에 들어왔다. 김일주의 아버지는 소를 잡아 국군을 대접했고, 아들을 나라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17세의 김일주는 국군에 입대했다.
김일주는 어느날 야간 전투에서 척추를 다쳤는데 중대장이 민간요법이라며 어디서 된장을 구해다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소금기가 들어가 염증을 치료했는지 일주일 쯤 지나자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고 한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병들은 제대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제대했다.
북한이 고향이라 갈곳이 없던 그는 전북과 천안에서 관 만드는 집, 솜 트는 집, 방앗간 등지에서 닥치는대로 허드렛 일을 했다. 그러나 고생스럽게 머슴살이를 했지만 세경을 받지 못했다. 천안에 있는 농고에 편입학 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없어 갈 수 없었다.
'링컨 자서전'과 미군 초병
포기하고 KLO(주한 첩보연락처)부대에 입대해 고향으로 다시 가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북한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고향 집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 손을 붙잡고 죽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도강증이 없어 여의도 밤섬 앞을 지나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다가 미군 초병한테 걸렸다. 김일주의 짐을 수색하던 미군 초병은 배낭 안에서 '에이브러험 링컨' 자서전이 나오자 깜짝 놀라 다급히 전화로 통역 장교를 불렀다.
링컨 자서전은 김일주가 천안의 한 중고책방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미국 시카고의 어느 대학 3학년에 다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미군 초병은 김일주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켈로 부대에 가지 말라.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며 만류했다. 미군 초병은 자신이 입었던 유엔 잠바를 벗어 김일주에게 입혀주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링컨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라"고 했다.
명동의 다방 청소부 생활
폐허가 된 서울 남대문에 도착한 김일주는 꿀꿀이죽(주한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재활용해 만든 잡탕 음식)을 사 먹었다. '여기서 주저 않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취직자리를 알아보려고 무작정 서울 거리를 헤맸다. 명동에서 샌프란시스코 다방을 발견하고 들어가 청소부로 받아달라고 했지만 자리가 없다고 쫓겨났다.
옆에 있던 모나리자 다방에 갔더니 마침 청소부를 찾고 있다며 받아줬다. 그러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며 잠자리를 제공해주지 않아 남대문 시장 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에 다방으로 출근해 청소를 했다.
나중에 김일주의 성실함에 감동한 다방 주인이 2층 빈방을 내주었지만 3개월 만에 다방일을 그만두게 됐다. 이부자리만 들고 종로구 안국동에 할머닉 혼자 사는 집에서 빈방을 얻어 숙식했다. 자동자 정비공장에 취직해 엔진 보링 등의 일을 하면서 번 돈과 모나리자 다방에서 번 돈을 모아 고등학교 편입 준비를 했다.
휘문고 학생이 된 김일주
인근에 있는 휘문고등학교를 찾아 복도를 서성거리는데 선생 한명이 다가와 김일주에게 "웬 놈이냐"고 물어 "이 학교학생이 되고 싶어 왔다"고 했다. 그러자 선생은 "니 마음대로 학교 학생이 되냐"며 화를 냈다. 김일주가 "그럼 이 학교는 돈 있는 집 아이들만 골라서 공부시킵니까?"라고 따지니 화가 난 선생이 김일주의 귀싸대기를 쳤다.
김일주가 울면서 "나는 북한에서 탈출해 전쟁도 참가하고 머슴살이, 다방 청소, 자동차 정비공을 하면서 공부하려고 왔는데 선생님은 교육자라면 나 같은 놈 길러서 지도자를 만드는게 임무가 아니냐"며 들이댔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김일주를 끌어 안고 "나도 북에서 왔다."며 함께 울었다. 그렇게 김일주는 휘문고 학생이 됐다.
평안북도 박천 출신의 한 국어교사는 월남 후 고려대를 졸업하고 휘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학교 측과 논의 끝에 김일주의 입학을 허락하고 등록금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다. 휘문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그에게 담임 교사는 “건국정치대학(현 건국대)의 학장이 너를 찾는다”고 전했다.
김일주는 학장실을 찾았고, 거기서 상허(常虛) 유석창(劉錫昶)박사를 처음 만났다. 유 박사는 청년시절엔 광복운동에 몸을 바쳐 남만주 군비단 참모가 되고, 의학으로 무산대중(無産大衆)을 구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민중병원을 창립했다. 건국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을 지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유 박사는 김일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 박사는 김일주의 아버지와 가족을 찾다가 그를 만나게 됐고, 그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건국대 입학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 휘문고 출신이라면 주로 고려대나 서울대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건국대에는 중동고와 한양공고 레슬링부 출신 학생들이 많았고, 이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건국대에서 학생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김일주는 김영준 후보와 맞붙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 김일주는 이를 지적하며 항의했고, 당시 2대 국회 사법분과위원장을 지낸 김정실 교수도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격분한 그는 학장실에서 책상을 집어던지며 항의했고, 결국 부정 선거가 인정됐다.
이후 김일주는 고려대 편입을 시도했다. 당시 학생이 부족했던 대학들은 편입생을 모집했고, 그는 유진호 고려대 총장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며 편입 허가를 요청했다. 유 총장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끈질긴 요청 끝에 2학년 편입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반대했다. “건국대 유 박사님이 너를 친자식처럼 돌봤는데, 배신한다면 우리 집 출입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유 박사를 다시 찾아가 사과했고, 유 박사는 “허물고 다시 짓자”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건국대 학생위원장 당선… 농촌 지도자로 성장
유 박사의 신뢰 속에 그는 건국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중앙학도단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졸업 후에도 유 박사의 신세를 계속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중앙시장에서 일하며 독립을 모색했다. 그러나 유 박사는 그를 다시 불러 축산대학 조교로 임명했다.
그는 방학 기간 동안 전국 106곳의 농촌지도자들을 모아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유 박사는 이를 적극 지원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로마 사회교육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협동조합과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스위스에서는 철저한 군사 대비 태세와 평생교육이 국가 발전의 핵심이라는 점을 배웠고, 독일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번갈아 가며 교육하는 시민 교육 방식을 접했다. 또한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 교육, 스웨덴의 소비 협동조합 등을 연구하며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교육 모델을 적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김일주는 이후 한국에서 농민 교육과 사회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기여하며, 한국 사회의 교육과 개혁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어갔다.
그는 "농촌 운동은 말로만 해서는 안 되고 직접 보여줘야 한다"며 "젊은이들과 함께 돼지와 소를 길러보이고, 지붕 개량과 부엌 개량을 직접 실천했다"고 했다. 또 농로 정비도 했는데 당시 활동은 MBC TV ‘농촌 혁명아 김일주’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이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1969년부터 월간 <농민문화>를 창간해 10년 간 발간했다.
경기도 시흥 목감에 평당 130원을 주고 구입한 땅에 1968년 12월 농민교육원을 세웠다. 농촌문화연구회, 직장새마을교육원 등으로 변모했다가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을 본떠 만든 지도자 교육기관인 한국지도자아카데미로 발전했다. 그는 토지 등 자신의 전 재산을 아카데미에 희사하고 개인 명의로 땅 한평 갖고 있지 않다.
당시 농민교육과 새마을운동의 경험을 살려 현재는 귀농과 관련된 교육과 외국인 근로자 대상 농업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귀농 교육 대상자는 정년퇴임한 공직자,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람, 군 제대 후 새로운 삶을 찾는 사람 등 다양하다. 이들은 8주 동안 농촌 이론 교육을 받고, 이미 성공적으로 정착한 농장을 방문해 실습도 진행한다. 김 원장은 "귀농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탈북민을 통일지도자로 키워야
실향민 1세인 김일주는 고향 후배들을 돕는 심정으로 2005년 통일부 산하의 북한이탈주민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당시 후원회는 직원 5명에 연간 예산은 3억 700만원이 전부였다. 김일주는 기업과 교회를 찾아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나 후원회 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후원회 예산을 62억원까지 증액했다.
2010년 3월 북한이탈주민후원회가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으로 승격됐고, 김일주는 초대이사장에 임명됐다. 258억원(2012년)의 예산을 확보하고, 다양한 탈북민 지원 활동을 진행했다.
김 원장은 다가오는 통일을 위해 탈북민들을 지도자로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과거 독일 통일에 서독으로 탈출해 간 동독이탈주민 57만 명의 역할이 컸다며 탈북민의 성공적 정착이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한국지도자아카데미에 다니는 탈북민 수강생들의 학비를 면제해주고 특별히 챙겨주고 있다.
김일주 원장은 "지도자는 스스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도전정신, 봉사정신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면서도 세계의 변화에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