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고환율 뉴노멀 인식에도 원화 약세 수입물가 끌어올려
- 물가 상승 역풍에 직면한 트럼프 행정부…농산물 관세 낮춰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지수와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환율은 1460.7원까지 올랐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지수와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환율은 1460.7원까지 올랐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위협하는 등 심상치 않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경제 위기 때마다 환율이 급등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환율은 800원대에서 1900원대까지 폭등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930원대에서 1570원대까지 올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코스피지수는 50% 이상 급락했고, 경상수지는 불황형 흑자를 기록했다. 경제 위축으로 수출보다 수입 감소분이 큰 상황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환율의 양상이 조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코스피지수가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일인 6월 4일 2770.84였던 코스피지수는 10월 27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 이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외환당국이 1400원을 강력한 저지선으로 여겼던 이유는 환율 급등이 곧 디폴트 리스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단기외채 비중이 높았던 탓에 원화가치가 폭락하면 외화 부채 상환 부담이 커지고, 이는 국가 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투자금의 급격한 유출로 직결된다.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국인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주가가 동반 급락하는 '트리플 약세'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코스피지수의 상승이 본격화한 6월 초에서 9월 말 사이 외국인 투자자의 순매수 규모는 두 배로 불어났다. 10월 24일 기준 코스피지수 시가총액 3243조원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의 보유액은 34.7%인 1124조원에 달한다.

이에 따라 외환당국은 최근 경계 태세를 높이고 있지만 과거처럼 경제·금융수장 회의체(F4) 등을 통한 적극적인 개입은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현재의 환율 상승이 국내 신용위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 컨센서스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나 국내 신용 스프레드 등 관련 지표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단기외채 상환 부담도 크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기준 단기외채 비중(단기외채/총외채)은 22.7%로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 기조도 견고하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고환율을 '뉴노멀'로 규정하며, 1300원대 후반에서 1400원대 초중반 환율이 새로운 균형 수준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일각에서는 국내 연기금과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투자 확대로 한국이 보유한 해외 순자산 규모가 가파르게 증가하며 외화 건전성이 오히려 강화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의 환율 변화를 이끄는 요인으로 '미국 예외주의'가 거론된다. 미국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경제를 주도하며 타국 대비 높은 성장률과 금리 수준을 유지하면서 달러의 추세적 강세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국내 외환시장의 구조적 수급 변화다. 과거에는 주로 외국인 투자금의 유출입이 환율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 연기금과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투자가 달러 수요를 유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율 상승이 무한정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통상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환율 급등세가 이어지면 소비자물가가 올라가고, 이로 인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면 내수가 침체되는 악순환이 초래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14일 발표한 ‘2025년 10월 수출입물가지수 및 무역지수 통계’에 따르면 수입물가는 전월 대비 1.9% 상승했다. 수입물가가 이 정도로 급등한 것은 지난 1월의 2.2% 이후 9개월 만에 처음이다.

이는 환율이 큰 영향을 미쳤다. 10월 평균 환율은 1423.36원으로 9월의 1391.83원 대비 2.3% 상승했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4.6% 뛰었다.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수입물가 상승을 일부 방어했지만 환율 폭등 여파를 만회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미국은 상호관세발(發) 인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한 상태다. 미국의 지난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대비 3.0%를 기록하며 이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물가 목표치 2%를 웃돌고 있다. 인플레이션 유령이 재등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커피, 바나나, 코코아, 소고기 등 중남미에서 수입하는 농산물의 관세를 철폐하거나 대폭 낮춘다는 방침이다. 이는 일괄적인 상호관세 부과가 미국 내 '장바구니 물가' 상승이라는 역풍으로 돌아온 데 따른 후속 조치로 풀이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4일 일부 주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유권자들에게 민감한 물가 이슈를 파고들며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환율, 미국에서는 관세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는 ‘주범’이 된 것이다./박동혁 기자 pdh@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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