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매하지 말고 구축하라—‘소비자’에서 ‘설계자’로의 대전환 -

 

신치범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 (사)미래학회 기획이사

‘글로벌 책임 강국’은 ‘부국강병’이다

현 정부가 천명한 ‘글로벌 책임 강국(Global Responsible State)’ 비전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나 소프트파워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현대적 선언이자,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국가 전략이다.

대한민국의 ‘부국(富國)’은 이미 상당 부분 달성했다. K-컬처와 첨단 기술 산업은 세계적 수준에 올랐으며, 우리는 글로벌 교역 시스템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번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글로벌 질서와 해상 교역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불안정한 번영’이다.

진정한 선진국, 즉 ‘글로벌 책임 강국’은 동맹이 제공하는 안보라는 공공재에 무임승차(Freer-riding) 하는 ‘안보 소비자’가 아니다. 스스로 국익을 수호하고 글로벌 안보 질서에 기여하는 ‘안보 생산자’가 돼야 한다. 이는 지난 70년간 이어진 의존적 동맹 모델을 넘어, 대한민국이 동맹의 수동적 파트너가 아닌 핵심축(Pillar)으로 거듭나야 하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강병’의 함정: 경항공모함(CVX)과 대칭적 사고의 종말

문제는 ‘강병(强兵)’을 달성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대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고가 플랫폼 수입에 매몰되는 ‘대칭적 함정(Symmetric Trap)’을 경계해야 한다.

이 ‘대칭적 함정’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과거 추진되었던 경항공모함(CVX) 사업이다. ‘대양 해군’이라는 명분 아래 수직이착륙기(F-35B)를 탑재하는 경항모 확보는 20세기형 ‘강함’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된 것처럼 저비용 드론과 미사일 공격에 치명적으로 취약한 ‘고가치 표적’을 우리 스스로 만드는 행위일 뿐이다.

이러한 전술 중심적 사고는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이 지적했듯, ‘승리의 조직자(Organizer of Victory)’였던 조지 마셜을 ‘전술 교관’으로만 축소 해석해 온 한국 군사학의 구조적 편향과 맞닿아 있다. ‘전쟁 수행 국가 시스템’의 설계라는 마셜의 진짜 유산을 보지 못하고, 플랫폼의 대칭적 획득에만 매몰된 것이다.

다행히 이 ‘함정’은 2025년 2월 CVX 사업이 공식적으로 폐기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드론 항모” 및 “유·무인 복합전투체계(MUM-T)” 개념이 대체하고 있다. 이 극적인 방향 전환이야말로 ‘대칭적 함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강병’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지상·해양·공중 MUM-T 체계 운용 개념. /국방기술진흥연구소 
지상·해양·공중 MUM-T 체계 운용 개념. /국방기술진흥연구소 

대안: ‘비대칭 K-RMA’라는 한국형 해법

‘글로벌 책임 강국’에 걸맞은 진정한 ‘강군’으로 가는 길은 필자가 거듭 주창해온 ‘비대칭성에 기반한 한국형 군사혁신(Asymmetric K-RMA)’에 있다. 이는 두 가지 전략적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우리의 ‘부(富)’를 ‘비대칭적 역량’에 집중하는 것이다. 2026년 정부가 제출한 66조 3천억 원의 국방예산안이 그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예산안의 진짜 핵심은 3축 체계 예산의 22.3% 증액이 아니라, ‘유·무인 복합전투체계(AI·드론·로봇)’ 예산을 77.7%로 대폭 증액한 것이다.

이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최정예 스마트 강군’의 본질이며, ‘비대칭 K-RMA’의 핵심인 ‘High-Low Mix’ 전력 체계의 구축이다. 우리의 압도적인 상업적 ‘부(富)’(IT·AI 기술)를 주권적 ‘강(强)’(AI 기반 군대)으로 직접 전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적 파괴’다.

둘째, 우리의 ‘비대칭적 산업 역량’을 동맹의 안보 자산으로 활용해 전략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 미 해군은 381척의 함대 목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압도적인 조선 역량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단 2곳뿐인 미 핵잠수함 조선소는 포화 상태이며, 함정 MRO(유지·보수·정비)는 심각한 병목 현상을 겪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화(Hanwha)가 필리(Philly) 조선소에 50억 달러를 투자해 미 해군의 함정 MRO 및 공급망을 재건하기로 한 것은 단순한 기업 투자를 넘어선 ‘전략적 신의 한 수’다. 미 해군성 장관이 직접 한국의 조선소를 방문하며 협력을 모색한 데서 보듯, 이는 우리가 수동적 ‘소비자’에서 벗어나, 동맹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안보 ‘생산자’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핵추진잠수함(SSN) 확보라는 우리의 숙원과도 직결된다. 2025년 APEC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SSN 건조를 승인한 것은 이러한 ‘그랜드 바겐’의 일환이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 필리 조선소에서의 건조를 언급했다. 필리 조선소는 핵 함정 건조 역량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바로 이것이 협상의 지점이다. 우리가 한화의 투자를 통해 미 해군의 재래식 함정 MRO 숨통을 틔워주는(Track 1) 사이,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조선 역량을 바탕으로 KSS-III Batch-III 50 사업을 ‘국내 건조’(Track 2)로 관철할 전략적 명분을 확보해야 한다.

결론: ‘사는 국가’에서 ‘설계하는 국가’로

‘글로벌 책임 강국’의 비전은 레토릭 그 자체로는 웅장하다. 그러나 그 비전은 ‘부국강병’이라는 튼튼한 기둥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둥은 CVX처럼 의존성을 내재한 20세기형 대칭적 방식으로 세울 수 없다.

이제는 대칭적 사고 대신 가성비 높은 비대칭적 사고로 전환하여 ‘비대칭성 기반의 한국형 군사혁신(Asymmetric K-RMA)’을 강력하게 추진해 진정한 강군으로 거듭나야 한다. 적의 급소(急所)를 지향하는 스마트한 강군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의 풍부한 산업 역량으로 동맹의 안보를 뒷받침하는 ‘기둥’이 되고, 세계 수준의 첨단 기술력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비대칭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의 ‘부(富)’를 이용해 단순히 무기를 ‘사는’ 국가가 아니라, 우리의 ‘부’ 자체가 동맹과 우리의 ‘강(强)’이 되는 ‘전략적 혁신 국가’를 지향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글로벌 책임 강국’ 비전에 걸맞은 진정한 선진국의 모습이다.

* 필자 소개 *

신치범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로서, 사단법인 미래학회 기획이사와 미래군사학회 사이버/네트워크 상임이사를 겸하고 있다. 『비대칭성 기반의 한국형 군사혁신』,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기원』 등 저술. 『국방환경과 군사혁신의 미래』 공저. 한미일 안보협력,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 미래 전쟁과 대한민국의 미래 담론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작권자 © 샌드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