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는 러-우 전쟁이 푸틴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 대사는 최근 서울 종로구 신영빌딩 북한인권박물관에서 SAND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 2년 8개월의 전쟁 기간 수십만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희생을 당했고, 푸틴이 그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오죽 급했으면 푸틴이 우습게 여기던 김정은에게 손을 내밀었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성과도 없고, 인력과 물자만 소모되는 전쟁이 지속될수록 푸틴의 정치적 입지는 약해질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 대사로 계실 때 만나 본 푸틴은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2000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주 러시아 대사를 지내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2000년 3월 시작된 대선에서 법과 질서의 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푸틴은 그해 5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푸틴을 만나보니 체구가 작은데 강직하고, 정확한 판단력이 과거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룬 전직 대통령을 닮은데가 있다고 생각 했다. 이후 푸틴을 만나 한국의 경제 발전상에 대해 브리핑도 많이 해줬고 러시아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대통령의 최대의 책무이니 한국의 경제모델을 한번 배웠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초기에 푸틴은 나를 비롯해 외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내 ‘KGB(옛 소련 비밀첩보국)’ 출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러시아에 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아닌 전체주의적 시장경제를 이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푸틴의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평가한다면?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군사력과 군수 산업 분야는 강국이지만 민생경제 측면에서는 수준이 낮은데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제재를 자처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은 푸틴이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병합한 것부터가 실수다. 당시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이 푸틴의 행동에 좀 더 단호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푸틴이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얻을 수 있는 매리트가 없는데 무리하게 침략한 것은 우크라이나를 나토와의 완충지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났다면 2014년처럼 미국과 나토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푸틴의 야망이 기정사실화 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의 공력이 우크라이나의 국토수호 의지와 역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나서부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세계로부터 제재를 많이 받고 있다.
러시아 경제 성장이 억제돼 인구 1억 4천만명에 달하는 러시아 GDP가 우리나라보다 적다. 푸틴은 현재 전쟁에 투입할 인력과 장비는 물론 돈도 없는 상황이다. 전쟁을 수주 안에 속전속결로 마무리 했더라면 피해를 줄였을 것인데, 우크라이나 진흙탕 속에 발이 묶여 버렸다. 푸틴이 크림반도를 강제 점령하고 나서 제재로 경제가 망가지고 달러도 말랐는데, 오죽하면 북한에까지 손을 내밀었겠나? 그리고 2년 8개월 동안 러시아 병사들이 많이 희생을 당했는데 푸틴이 그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다. 사실 이번 러-우 전쟁이 푸틴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마지막 시즌이 될 것 같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전문가들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외교안보 스터디 그룹이 있는데 벌써 1년 반전부터 북한군이 참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었다. 와그너 용병 그룹의 대표였던 프리고진 사망 이후 러시아의 병력 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북한이 아무래도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러시아가 아무리 독재 제체지만 이번 전쟁으로 70만명에 가까운 인력 손실이 발생해 내부 불만이 적지 않다. 와그너 용병 그룹의 경우 죄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어도 싼 값에 처리하면 되지만 일반 병사들의 경우는 보상금이 다르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 젊은이들의 해외도피가 늘고, 전쟁에 반대하는 인원이 늘어 러시아 정규군의 인력 보충도 잘 안 된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몇 달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와그너 용병그룹의 붕괴 이후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러-우 전쟁이 지속될수록 더 많은 북한군인들이 러시아 전장에 끌려갈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는 7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장에서 싸울 군인을 충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다급해진 푸틴이 김정은을 만나 무기지원 뿐 아니라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김정은은 돈 몇푼에 북한 청년들을 푸틴에 팔아 먹었다. 만성적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푸틴은 김정은에게 병력 보충을 계속 요구할 것이며, 돈이 필요한 김정은은 올해 1만여명 파병에 그치지 않고, 계속 파병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북러가 용병들의 몸값을 얼마로 정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지만 2천 달러 얘기가 나오는걸 보면 몸값을 상당히 올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달러가 부족한 푸틴이 김정은에 달러를 준다는 보장은 없다. 북한도 지금처럼 군수물자와 병력을 계속 러시아에 보낸다는 보장도 없다.
또 북한군이 투입되더라도 쿠르스크 등 주요 격전지 탈환은 어려울 것이다. 실전 경험이 전무한 북한군은 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은 우크라이나 군을 당할 수 없다. 드론과 첨단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미국과 서방의 첨단 무기들이 총집합한 곳이 쿠르스크 전선이다. 러시아군도 뺏긴 지역을 북한이 탈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또 북한이 지원한 무기도 60 ~ 70년대 생산한 것들로 성능이 형편 없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러시아 내부의 반응은?
=쿠르스크를 뺏기고 나서 러시아 국민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인 푸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해서 얻은 것보다 자기 나라 땅을 내주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만약 쿠르스크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을 향해 ‘자기 나라 땅을 뺏기면서까지 왜 전쟁을 했나’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푸틴은 정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재 러우전쟁을 보면, 오히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쿠르스크 지역을 점령하고 반격을 가하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쿠르스크를 우크라이나 땅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푸틴의 크림반도 침략과 비슷한 양상의 전략을 우크라이나가 쓰는 것이다. 이는 푸틴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투표를 하면 러시아 사람의 70% ~ 80%가 좋다는 결과가 나오지만 독재 체제 하에서 사실은 불만이 많아도 드러 내놓기 쉽지 않기 때문에 민의가 왜곡됐다고 볼 수 있다.
푸틴은 지금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데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도 영토를 뺏기고 많은 인력을 상실하고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불만에 직면해 있다. 또 푸틴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이란의 지원을 조금 받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받기 어려워졌다. 이란도 전쟁을 이미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반군을 앞세운 이스라엘 공격을 계속 조종하면서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를 도와줄 여력이 없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도와줄 국가는 이젠 북한 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 푸틴은 내부적으로 러시아를 서글픈 나라로 만들었다는 비난에 직면하고, 국제적으로 유엔 상임이사국의 체면도 다 줴버리고 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도움까지 받아야 하는 구걸 국가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쓰게 됐다. 한마디로 푸틴 때문에 러시아 국민이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러시아 역사를 보면 1917년 로마노프 왕조가 농노들의 혁명으로 무너져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고, 소련이 70년 만에 붕괴 후 혜성처럼 등장했던 푸틴의 장기집권 독재가 러-우 전쟁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재춘 전 대사는
2000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장관급 특명전권대사인 주 러시아 대사를 지냈고 2003년 2월 외교통상부에서 퇴직했다. 그해 4월 홍조근정(紅條勤政) 훈장을 받았다.
△동북아 1과장(1981)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1983) △외무부 아주국장(1991) △외무부 제1차관보(1995) △주EU 대사(1996) △주벨기에·EU 대사(1998) △주러시아 대사(2000~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