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석학의 강대국 비전, 경주에서 답을 찾다

3중 절정, 문명사적 기로(岐路)에 선 대한민국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다자외교 행사를 넘어, 대한민국이 처한 문명사적 분기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역사적 현장이었다. 우리 시대의 원로 김진현 전 장관이 설파한 ‘3중 절정(三重 絶頂)’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중력장을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 첫째는 반세기 만에 이룬 경이로운 근대화 성공의 절정, 둘째는 극심한 이념, 세대, 젠더 갈등으로 점철된 ‘도착적 근대화(perverted modernization)’의 절정, 그리고 마지막은 인공지능(AI)과 인구 절벽이라는 인류사적 도전에 가장 먼저 직면한 문명사적 위기의 절정이다.
경주 APEC은 이 3중 절정의 모든 면모를 남김없이 투영했다. 회의의 성공적 개최와 AI·인구 문제라는 미래 의제의 선점은 우리의 높아진 국격을 증명하는 첫 번째 절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회의의 이면을 지배한 미·중의 노골적인 패권 경쟁과 그 사이에서 우리의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외교전은, 외부의 압력이 내부의 분열을 증폭시키는 두 번째 절정의 현실을 드러냈다. 나아가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걸고 제시한 의제 자체가 우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문명사적 대전환의 파고를 가장 앞에서 맞이하고 있다는 세 번째 절정의 의미를 웅변한다.
따라서 ‘경주 선언’은 단순한 성과 보고서가 아니다. 이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의 기로에 선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준엄한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이 위태로운 절정 위에서 내분과 외압에 휩쓸려 쇠락의 길로 접어들 것인가, 아니면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동력으로 전환하여 진정한 ‘세계 중심국가’로 도약할 것인가.

경주에서 확인한 지정학의 두 얼굴: 다자주의와 힘의 정치
강대국 전략은 냉엄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주를 무대로 펼쳐진 지정학은 두 개의 평행 세계가 공존하는 현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하나는 ‘연결, 혁신, 번영’을 외친 APEC의 공식 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각국의 국익이 첨예하게 충돌한 양자 회담의 무대였다.
1. 미중의 ‘위태로운 휴전’과 두 개의 세계 질서: 이번 APEC의 실질적 주인공은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하를 약속하고, 시진핑 주석이 희토류 수출 재개와 미국산 대두 수입으로 화답한 ‘거래’는 국제 언론에 ‘성공적인 포효(roaring success)’로 묘사되며 일시적 봉합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합의를 바라보는 양국의 시선은 세계 질서를 둘러싼 근본적인 시각차를 드러냈다.
미국 언론이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실리 외교의 성과로 평가한 반면, 중국 관영 매체들은 시진핑 주석을 다자주의와 개방 경제의 수호자로 부각하며 미국의 고립주의와 대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대한민국과 같은 중견국이 다자 협력의 이상과 양자 간 힘의 정치라는 두 개의 트랙 위에서 동시에 생존해야 하는 고도의 전략적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2. 한미동맹의 ‘전략적 재투자’: 한미정상회담에서 진전을 이룬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는 이러한 힘의 정치에 대응하는 우리의 현실적 선택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궁화 대훈장과 천마총 금관을 선물하는 파격적 환대를 베푼 배경에는, 자동차 등 핵심 산업을 위협하는 징벌적 관세의 위험을 완화하고 동맹의 경제·기술적 토대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다.
이는 더 이상 동맹이 안보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보증수표가 아니라, 우리의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그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역동적 관계로 변했음을 상징한다. 3,500억 달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동맹이라는 가장 확실한 국가안보 자산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보험료’인 셈이다.
3. 한미일 삼각 협력의 전략적 필연성: 『한미일 안보 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기원』 저자로서 필자가 가장 주목한 것은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리와의 한일정상회담이었다.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 발표에 따르면, 양국 정상은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인 관계 발전’에 합의하며, 특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한일 및 한미일 간의 긴밀한 공조’가 중요함을 재확인했다.
이는 역사 문제라는 잠재적 갈등 요인에도 불구하고, 북핵 위협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공동의 전략적 도전이 양국의 이해관계를 강력하게 수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한미동맹을 축으로 기능적인 한일 협력이 더해질 때, 우리의 안보는 더욱 입체적이고 굳건해진다. 한일관계 개선은 이제 선택이 아닌, 안정적인 역내 안보 구도를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 되었다.
4. 한중 관계의 실용적 관리: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회담은 우리 외교의 핵심 과제인 ‘균형’의 필요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한미동맹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최대 교역 파트너이자 북한 문제의 핵심 변수인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피하는 것은 국익을 위한 실용적 선택이다. 이근 서울대 교수가 경고했듯, 확고한 전략적 비전 없이 경제적 상호의존에만 매몰될 경우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미일 안보 협력의 강화를 통해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실용 외교의 핵심이다.
두 거인의 통찰, 위기 속에서 길을 찾다
경주에서 확인된 지정학적 현실은 우리에게 강대국으로 나아갈 길을 묻고 있다. 그 길은 김진현 전 장관의 통찰과 이근 교수의 비전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김진현 선생은 우리가 겪는 ‘3중 절정’의 고통을 인류 보편의 문제를 해결할 자산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문명의 가치와 규범을 창조하는 ‘세계 중심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근 교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강대국 비전의 부재가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혜자에서 이제는 그 질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능동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놀랍게도, 이번 경주 APEC의 핵심 성과들은 두 석학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완벽한 전략적 청사진을 제공한다. ‘경주 선언’의 핵심인 ‘APEC AI 이니셔셔티브’와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협력 프레임워크’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칼럼의 핵심 주장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구 소멸의 위기를 맞았고, AI 혁명의 가장 역동적인 실험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국가적 난제를 APEC의 핵심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이를 글로벌 리더십의 발판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전략적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AI 시대의 국제 규범과 표준을 우리가 주도하고, 인구 위기 해법을 통해 모든 선진국이 겪게 될 미래 문제의 솔루션 공급자가 되는 길을 연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위기가, 가장 위대한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경주에서 증명했다.
비전을 넘어 실천으로, 자강(自强)의 길을 열다
비전과 청사진은 마련되었다. 남은 것은 이를 실행할 국가적 의지, 즉 ‘자강(自强)’이다. 첫째, 앞서 분석한 ‘전략적 삼위일체(Strategic Trinity)’를 완성해야 한다. 현대화된 한미동맹, 기능적인 한미일 삼각 협력, 그리고 실용적인 한중 관계는 분리된 외교 현안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둘째, ‘외교・안보의 국내 정치화’라는 내부 분열의 암초를 넘어서야 한다. 국가 백년대계가 정파적 이익에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강대국 전략도 추진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다음 선거 너머를 보는 비전과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용기를 갖춘 리더십이 절실하다.
경주 APEC은 우리에게 길을 밝혔다. 우리의 도전이 세계의 도전이며, 우리의 해법이 세계의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질문은 우리가 강대국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해낼 의지가 있는가’이다. 경주의 유산은 앞으로 우리가 써 내려갈 행동으로 기록될 것이다.
강대국을 함께 꿈꾸는 김진현 선생의 전략적 통찰로 마무리한다. “어제와 오늘의 진실 그리고 내일의 알찬 꿈이 융화의 용광로에서 녹아야 바른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
* 필자 소개 *
신치범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로서, 사단법인 미래학회 기획이사와 미래군사학회 사이버/네트워크 상임이사를 겸하고 있다. 『비대칭성 기반의 한국형 군사혁신』,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기원』 등 저술. 『국방환경과 군사혁신의 미래』 공저. 한미일 안보협력,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 미래 전쟁과 대한민국의 미래 담론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