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범 건양대 군사학과 신치범 건양대 군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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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정학적 각축장이 된 APEC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더 이상 무역 자유화를 논하는 온건한 다자 경제 포럼이 아니다. 이곳은 미중 전략 경쟁이 펼쳐지는 최전선이자, 각국의 생존 전략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한국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은 기존의 외교 문법을 무력화하며, 대한민국에 근본적인 대전략의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 ‘고래 사이의 새우’라는 수동적 은유에 갇혀 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격랑의 파도를 스스로 헤쳐나가는 능동적 설계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 본 칼럼은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과 리더십 변수를 심층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APEC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추진해야 할 구체적인 대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지정학적 대격변: 3대 변수와 기존 협력 틀의 충돌

대한민국의 대전략은 시진핑 주석의 중국,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와 같은 거대한 지정학적 상수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가올 격변의 향방을 가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변수는 새롭게 등장한 한미일 3국의 지도자가 기존의 협력 구조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있다.

필자가 저서에서 역설했듯, 한미일 안보협력은 특정 정권의 선언이 아닌, 점진적으로 제도화된 ‘중층적 구조(Multilayered Structure)’의 산물이다.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이 구조를 공식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안보(한미일 연합훈련), 경제(경제안보대화, 공급망 조기경보체계), 기술(공동연구) 등 각 분야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작동하는 다층적 메커니즘을 구축했다. 이처럼 제도화된 협력체계는 정치적 변수에도 협력의 관성을 유지하는 지속 가능한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트럼프, 다카이치, 이재명이라는 새로운 리더십은 바로 이 협력 구조에 각기 다른 방향의 압력을 가하며 그 내구성을 시험하고 있다.

첫째, 트럼프의의 거래주의는 협력 구조의 근간인 ‘동맹의 가치’를 시험한다.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그의 접근법은 공유된 가치나 역사보다 가시적인 비용과 편익 계산을 우선시한다. 이는 동맹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중대한 도전이지만, 역설적으로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이재명 정부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70년 우정’ 같은 상징적 언어 대신, 한국의 투자가 창출하는 일자리 수, 국방비 지출의 기여도 등 구체적인 수치로 동맹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준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한미동맹 관계를 보다 현실적인 국익의 관점에서 재정립하고 협상력을 발휘할 공간을 열어준다.

둘째, 다카이치의 국수주의는 한일관계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강경한 역사관은 경제·기술 협력 강화보다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한미일 협력 전체를 흔드는 핵심 안보 취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카이치 총리가 가진 정책의 양면성을 직시하고, 이를 역이용하는 정교한 ‘투트랙(Two-track)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녀의 강경한 대중국 안보관과 첨단기술 보호 의지는 역설적으로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의 중층적 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대일 전략은 안보·기술 협력은 가속화하되, 역사 문제는 원칙을 견지하며 철저히 분리 대응하는 양면적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이재명 정부의 실용주의는 이 구조를 국익 극대화를 위해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겨준다. 이념보다 실질적 경제 성과를 중시하는 접근은 자칫 미중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인 수동적 균형자로 비춰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도전 요소를 기회 요인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양측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기술적 린치핀(Linchpin)’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공세적 전략을 펼쳐야 한다.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기술 우위를 활용해 미국에게는 탈중국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중국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부품 공급원으로서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존 협력 구조 내에서 한국의 발언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II. 대한민국 APEC 대전략: 3대 핵심축

이러한 복합적 도전에 맞서, 대한민국은 다음의 3대 핵심축을 중심으로 한 대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각 제언은 APEC이라는 다자 무대를 활용하되, 실질적인 성과는 양자 및 소다자 회담에서 확보하는 현실적 접근에 기반한다. 특히 10월 29일 한미 정상회담이 11월 1일 한중 정상회담보다 먼저 열리는 외교 일정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대중 관계를 설정하겠다는 현 정부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한미회담에서 확보한 성과를 지렛대로 한중회담에 임하는 정교한 연계 전략이 필수적이다.

제1축: ‘기술 중견국’ 외교의 재조정 - 거대 담론에서 구체적 기술 거래로

‘기술 중견국’ 비전의 성공은 거대 기구 창설이 아닌, 10월 29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실현 가능한 기술 협약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 있다. ‘글로벌 반도체 위원회’라는 아이디어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 내용을 담은 ‘반도체 안보 딜(Semiconductor Security Compact)’로 재구성하여 제안할 수 있다.

∙대미 투자와 일자리 창출 연계: 한국 기업의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투자 계획을 구체적인 일자리 창출 숫자로 제시하고, 이를 상호 관세 인하의 대가로 연계한다.

∙수출 통제 공조: 레거시(구형)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대중국 수출 통제를 양국이 공동으로 조율하는 실무 협의체를 제안한다.

이는 추상적인 공급망 안정 논의를 ‘미국 우선주의’에 부합하는 가시적인 성과로 전환시켜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관련 압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막을 구축하는 현실적 방안이다. 더 나아가, 이 ‘반도체 안보 딜’ 제안은 최근 재개된 한미 핵협의그룹(NCG) 논의와 연계하여 첨단기술 동맹이 확장억제력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임을 트럼프 행정부에 각인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제2축: 소다자주의의 구체화 - 추상적 연대에서 프로젝트 기반 연합으로

APEC 전체의 합의를 기다리기보다, 특정 현안에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의향국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을 구성하여 가시적인 프로젝트 출범을 주도할 수 있다.

∙‘핵심 광물 클럽’ 이니셔티브: ‘녹색에너지 공급망 동맹’이라는 모호한 개념 대신 APEC 기간 중 열리는 양자 회담을 활용해 호주,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 자원 부국들을 ‘핵심 광물 클럽’에 공식 초청할 수 있다. 이는 신규 광산 개발을 위한 공동 투자 펀드 조성, 한국 기업과의 장기 구매 계약 정부 지원 등 철저히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를 가져야 한다.

∙‘한-아세안 스마트 인프라 컨소시엄’: 중국의 ‘일대일로’와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APEC에 참석하는 아세안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한국이 강점을 가진 스마트 시티, 5G 네트워크 등 틈새 기술 시장을 공략하는 ‘한-아세안 스마트 인프라 컨소시엄’ 설립을 제안할 수 있다. 이는 지정학적 부담 없이 참여를 유도하고 역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정교한 전략이다.

제3축: 경제 헤징의 실용적 프레임워크 - 원칙 역설에서 우선순위 행동으로

우리 경제의 기반(fundamentals)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헤징(Hedging)’ 전략을 구체적 행동 계획(Action Plan)으로 전환할 수 있다.

∙‘10대 핵심 품목’ 공급망 다변화: 11월 1일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관계 복원과 함께 희토류 등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인 ‘10대 핵심 산업 품목’에 대한 공급망 안정화를 최우선으로 논의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APEC 회원국과의 양자 회담을 통해 해당 품목들의 대체 공급망을 확보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APEC 경제적 강압 정보 공유 네트워크’ 제안: ‘규칙 기반 질서’를 역설하는 대신 회원국들이 갑작스러운 통관 지연, 비공식적 불매 운동 같은 경제적 압박 사례 정보를 공유하는 자발적이고 비공식적인 ‘APEC 경제적 강압 정보 공유 네트워크’를 제안할 수 있다. 이는 전면적인 무역 분쟁을 촉발하지 않으면서도 투명성을 높여 공동 대응의 기반을 마련하는 실용적인 방안이다.

결론: ‘대양의 돌고래’를 향하여

지금까지 제시한 대전략은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고래 사이의 새우’라는 낡은 은유를 거부한다. 대신, ‘대양의 돌고래’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안한다. 돌고래는 바다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아니지만, 지능적이고 민첩하며, 무리를 지어 협력하고(minilateralism)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기술력)을 활용하여 복잡한 환경을 헤쳐나가며 번성한다.

트럼프 대통령, 다카이치 총리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지도자들의 시대에, 우리의 안보와 번영은 더 이상 전통적 동맹이나 안정적 국제질서에 대한 희망에만 기댈 수 없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지능적이며 민첩한 국가 전략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2025년 경주 APEC은 대한민국이 다가올 폭풍우를 헤쳐나가고 인도 태평양 지역의 핵심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행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역사적 시험대가 될 것이다.

* 필자 소개 *

신치범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로서, 사단법인 미래학회 기획이사와 미래군사학회 사이버/네트워크 상임이사를 겸하고 있다. 『비대칭성 기반의 한국형 군사혁신』,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기원』 등 저술. 『국방환경과 군사혁신의 미래』 공저. 한미일 안보협력,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 미래 전쟁과 대한민국의 미래 담론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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