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 위한 재정중독에 '래칫 효과' 작동…다시 줄이기 어려워
- 소비쿠폰 등 확장 재정이 '선투자', '착한 빚'이라는 것은 허구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왼쪽)가 지난 6일 임명 27일 만에 전격 사임하면서 재정위기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연합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왼쪽)가 지난 6일 임명 27일 만에 전격 사임하면서 재정위기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연합

피그스(PIGS)는 2010년대 재정위기를 겪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4개국을 말한다. 막대한 부채로 디폴트(채무불이행)까지 몰렸던 데다 시에스타(낮잠)라는 특유의 문화로 인해 식량만 축내는 돼지(pig)에 비유된 것이다.

디폴트가 발생하면 국가신용등급이 급락하고, 해외로부터의 자금조달이 사실상 중단되며, 환율과 금리 급등으로 실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게 된다. 또한 국제 금융망에서도 배제돼 경제적 고립을 당하게 된다.

통상 재정위기는 '재정중독'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재정중독은 선심성 정책이나 포퓰리즘 복지로 정부 지출을 멈추지 못하는 중독적 재정 운영을 말한다.

선심성 정책이나 포퓰리즘 복지를 위한 재정중독은 한 번 수혜자가 정해지면 좀처럼 되돌리기 어렵다. ‘래칫 효과’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래칫은 역회전 방지 톱니바퀴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일이 발생하기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경제학 용어로 쓰일 때는 한 번 늘어난 예산이나 소비를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이 때문에 재정중독의 늪에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어렵다. 더구나 거의 모든 복지제도는 도덕적 해이를 낳거나 빈곤선 이하의 한계계층을 양산해서 예상보다 지출 규모를 늘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재정중독은 재정위기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PIGS의 선두주자 격인 그리스다. 1981년 그리스의 총리가 된 사회주의 정치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취임 직후 각료들에게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라”고 지시했다. 이 때 나온 최저임금 인상, 공무원 증원, 전(全) 계층 무상의료, 연금 지급액 인상 등은 그가 11년 동안 장기 집권한 배경이 됐다.

이는 문제의 시작이다. ‘퍼주기’에 길들여진 유권자의 표를 가져오기 위해 다른 정당도 앞다퉈 비슷한 공약을 내걸면서 그리스는 재정중독에 빠졌다. 그의 집권 직전 20%선이었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1990년대 초 100%를 넘겼다.

재정중독은 과도한 빚을 후대에 떠넘긴다는 점에서 미래세대 약탈로도 불린다. 실제 ‘포퓰리즘 청구서’는 30년 뒤 그의 아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집권할 때 돌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3차례에 걸쳐 3260억 유로(약 462조원)의 구제금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구제금융의 조건인 긴축 재정과 공공부문 수술이 그만큼 가혹했다는 것이다.

PIGS가 ‘유럽의 문제아’에서 벗어날 즈음 또 다른 나라가 재정위기에 직면해 IMF의 구제금융이 목전인 상황을 맞고 있다. 바로 프랑스다.

프랑스의 올해 1분기 기준 국가부채는 3조3454억 유로(약 5461조원)에 달한다. 지난 수십 년간 재정적자가 계속되면서 2000년대 초반 GDP의 60% 수준이던 국가부채 비율이 현재는 114%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저성장으로 세입은 줄어드는 반면 선심성 정책과 포퓰리즘 복지로 정부 지출이 계속 늘어난 결과다.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프랑스의 2023년 기준 사회보장지출 규모는 GDP 대비 31.3%에 이른다. 이는 EU 27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이 때문에 프랑스가 '복지병'에 걸렸고, 이로 인해 재정중독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지병은 복지제도의 과도한 확대와 남용으로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본래 목적과 달리 무임승차, 게으름, 재정 악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저소득층, 청년, 실직자 등에게 식료품과 생필품 지원은 물론 장기임대 아파트나 주택이 저가 혹은 무료로 제공된다. 대학생은 월세, 교통비, 장학금 지원 외에 기숙사와 식당을 무료 또는 저가로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실직자는 최종 임금의 60~75%를 최장 2~3년 받을 수 있고, 일하지 않더라도 성인이면 매달 600유로(약 100만원)가 기본소득으로 나온다. 아울러 자녀수에 따라 가족수당, 자녀수당이 매달 지급된다.

한국에서도 재정중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IMF는 지난 9월 보고서에서 한국의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에 수렴함에 따라 대규모 재정지출 압력에 대응할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재정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잠재성장률은 노동, 자본, 자원 등 모든 생산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의 성장 속도가 둔화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늘어날 복지비와 고령화 부담을 대비해 빚이 불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는 소비쿠폰으로 대변되는 단기적 경기 회복을 위해 확장 재정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50% 안팎의 국가채무 비율은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빚을 져서라도 재정을 풀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선(先)투자’와 ‘착한 빚’ 논리는 허구라는 지적이 나온다.

PIGS나 프랑스 사례에서 보듯 재정중독의 늪에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힘들다. 늪 주위에 울타리를 치는 재정준칙은 유야무야 실종 상태다. 재정중독은 재정위기의 전조(前兆)며, 경제의 기초체력을 갉아 먹는다. 종착지는 국가 부도다./정구영 기자 cgy@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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