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정은의 직접 입장 표명
북한은 2025년 9월 20일부터 이틀간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회의는 과거와 달리 최초로 국기게양식을 진행하고, 주요 간부들의 주석단 등장, 국가 연주, 의안 상정의 순으로 회의운영 방식이 완전히 변경하였다. 이같은 변화를 정치적 의례의 변화라기보다는 김정은을 국가주권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최고인민회의의 권능을 강화하고 법과 제도에 근거한 국가운영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운영방식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든 김정은이 곧 북한이라는 북한체제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이유는 없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회의에서 김정은이 대남 및 대미 관계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또다시 밝혔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먼저 미국에 대해 ‘미국이 비핵화를 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데 기초하여 진정한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언급하면서 ‘트럼프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는 개인적인 감정도 덧붙였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 김정은은 ‘마주앉을 일이 없으며, 무엇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고, 일체 상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 강조하였다.
지난 7-8월간 김여정이 수차례 담화를 통해 기존 입장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다시 김정은이 직접 원칙적 입장을 내놓았을까? 아마도, 오는 9-10월 국제정치의 계절과 내부행사 등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APEC을 계기로 김정은-트럼프 회동을 시도하려는 아이디어가 제기되고, 북한으로서는 9차 당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대북접근 시도도 차단하면서, 대내의 적대적 두 개 국가 노선을 굳건히 해야 하는 등의 필요가 있었기에 김정은이 직접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번 김정은의 연설을 통해 북한의 입장이 비록 남한과는 단절하고 있지만, 미국과는 대화 분위기로 전환하려는 시작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과연 그러한가?
□ 남북관계의 ‘국가성’ 강조와 남한 ‘길들이기’
김정은은 이번 연설을 통해 남북은 사실상 두 개 국가로 존재하며 첨예하게 대치해 온 것이 역사이자 현실이라면서 남북의 ‘국가성’을 강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단독정부 수립부터 정전협정, 유엔동시가입을 국가성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남북이 적대적 국가라는 근거로 한미군사연습과 헌법의 영토조항을 거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질적인 국가들이 결코 하나로 될 수 없다면서 두 개 국가를 국법으로 고착시키겠다며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였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미북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부터 대남 적대적 비난을 시작하였다. 이후 김여정의 입을 빌어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 이라는 언급(2022.8.19.)에 이어, 급기야 2023년 말 ‘적대적 두 개 국가’를 표방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김정은은 십 여년 동안의 남북교류 상황을 분석하면서 더 이상의 남북접촉은 북한 체제에 이익보다는 사상이완 등 체제유지에 해로울 뿐이라는 판단 끝에 ‘두 개 국가’를 공식화한 것이다.
이제 남북의 ‘국가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남한의 이재명 정부를 길들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남한 정부와 정치권 일각이 앞장서서 ‘적대적 두 개 국가’를 순치시킨 ‘평화적 두 개 국가론’을 전파하고 있는 현실을 더욱 추동함으로써 북한의 입장을 부담없이 따르도록 하는 한편, 남한내 국론분열까지 도모하는 좋은 수단인 것이다.
둘째, 김정은은 ‘통일 불가’ 발언을 통해 이재명 정부의 ‘선평화 후통일’ 입장을 후원하면서 일절 ‘통일’ 담론을 금기시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통일은 대결이고, 대결은 전쟁이라고 단순 도식화시킴으로써 남한정부로 하여금 통일보다는 평화에 매달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남한과의 대결국면으로 인한 국력낭비 상황에서 벗어나 보려는 것이다. 여기에 핵 억제력의 제2의 사명, 즉 선제 핵공격 위협까지 곁들임으로써 더욱 남한정부가 더더욱 평화에 집착하도록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셋째, 남북관계의 적대적 실태요인을 제멋대로 규정하면서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책임을 남한에 전가하는 한편, 향후, 남한 정부가 북한 입장을 정책에 반영하도록 간접적으로 강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 헌법의 영토조항이 마치 적대적 관계의 근거인 것처럼 언급하고, 이재명 정부의 한미군사연습 지속 및 군사비 증가를 지적하는 등 북한이 바라는 기대상황의 목록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향후 개헌 등 계기시 이를 남한 정부가 반영하도록 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남한내부에 통일 거부감을 조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남한정부와 국민들로 하여금 영토적 관할권이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남한 지역만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대남 메시지를 통해 북한내부에도 강력한 대남단절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부터 대북유화책에 따른 남북접촉 시도가 점증하는 상황에서 김정은의 의지를 강력하게 알림으로써 북한 내부의 혼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편, 향후 접촉과 대화 등 일체의 남북교류는 불가하다는 강력한 경고를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 유지 목표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미북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북대화가 재개될 수 있는 조건을 이미 상향조정하였다. 2019년 말에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기 전에는 비핵화 협상에 대하여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면서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대화의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2019.11.19, 김영철 아태평화위 위원장 담화). 대북적대시 정책이라면 한미동맹과 한미군사연습을 비롯하여 종교, 테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축되어있는 대북제재를 총칭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와 협상을 하는 것인데 사전에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야 대화를 하겠다는 말이니 미북대화에 미련이 없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의 김정은 발언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은 ‘핵보유국간의 대결수위가 전례없이 고조되었다’고 현실을 진단하면서도 북한의 핵무력 증강에 의해 지역에서의 힘의 균형이 보장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또한, 핵보유는 북한의 생존의 문제로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고 강조하면서 ‘비핵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며, 제재를 풀기위해 연연하지 않겠다며 시간도 자신의 편이라고 언급하였다.
나아가 핵 억제력이 상실된다면 제2의 사명이 가동되어 한국과 주변지역, 동맹국들이 괴멸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반면,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인정한다면 미북간 대화도 가능하다면서, 트럼프와도 개인적으로 좋은 감정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전형적인 ‘채찍과 당근’을 동원하여 미국을 끌어당기는 수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의 이번 연설을 보면, 미국과의 전략적 핵 균형이 목표임을 밝힌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금껏 ‘북한 비핵화’라는 세간의 담론을 뛰어넘어 남한과의 전략적 균형이 아닌, 비록 아직은 한반도에 국한하고 있지만 핵을 통해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전쟁억지력이 가동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함과 동시에 전쟁억지력의 제2의 사명을 운운한 것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핵능력 강화로 전략적 균형이 깨진다면, 선제공격하겠다는 위협이 바로 그것이다.
한・미・일의 북핵 대응능력 강화가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깬다는 왜곡을 통해 북한의 핵능력을 고도화할 근거를 만들고, 선제공격까지 위협함으로써 미국의 확장억제강화, 전술핵 한국 재배치 및 한・일의 핵개발 가능성 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다음, 미국과의 대화 조건으로 ‘비핵화 포기와 북한의 핵 보유국 인정’을 재차 공식화한 것은 미북 대화의 성사 여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라고 본다. 비핵화를 의제로 성사된 2018년 싱가포르 미북 합의를 기초로 대화를 모색하려는 미국에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하여 압박함으로써 미북 대화 재개의 부담을 미국에 떠넘긴 것이다. 또한, 제재도 상관없다는 등 북한의 입지가 과거와 비할 바 없이 유리해졌다는 점도 과시한 것이다.
미북 대화가 성사되지 않아도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사실상 제재 해제’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는 유리한 국면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본다. 반대로,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묵시적으로 받아들여 대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국제정치적으로 북한에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국이 지도해 온 국제적인 핵 레짐의 한 축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며, 한・일 등 동맹국들과 북핵 대응을 둘러싼 균열도 발생할 가능성이 크므로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흔들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메시지를 고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한이 대북 접근을 가시화하면서 중국, 러시아에 남북간 대화국면 조성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 예상이 된다. 중・러가 이를 수용하여 북한에 남북대화를 권유할 수도 있으므로 김정은이 직접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본다.
□ 북한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 변화 노력이 우선
지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면서 미국이 피스 메이커가 되어 북한과 대화하라고 권유했다. 남한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미국이 나서 남북간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를 희망하는 접근법이다. 반면, 통미봉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다. 미북 대화는 과연 남북대화에 호재가 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한다 해도 지역에서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목표 때문이다. 자신들의 핵능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미래의 핵 전력 확충을 억제하는 대가로 미국에게 먼저 전략적 균형에 위협요인이라고 주장하는 한미군사연습과 첨단핵전력의 한반도 전개 등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후에는 주한미군 전력 약화는 물론 철수까지도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설사 남북대화가 성사된다 한들 북한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과 같은 의제를 다루려 하겠는가? 또한, 남한으로서는 안보 위기 상황이 도래하는데 정치군사적 의제를 제외하고 기능주의적 접근에 따른 평화 추구가 과연 현실적인지 의문이다. 자칫, 미북 대화를 통해 핵레짐과 한・미・일 협력구도에 균열이 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예상된다면 응당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바꾸면서, 북한이 스스로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섣부른 대화와 평화 타령은 그 이후에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