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호관세는 美 일방적 조치이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상호적
- 인플레이션 유령 소환, 무역량 감소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도

한미 양국은 지난 7월 30일 타결한 관세협상에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와 자동차 등 품목별 관세를 낮추는 대신 한국은 3500억 달러(약 48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미 투자 이행 방식이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최종 합의는 장기화 국면에 접어드는 모양새다.
현재 한국은 보증이나 대출 등 간접적 방식으로 대미 투자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은 한국이 미국 내에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우고, 전액 달러 현금을 넣는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투자 수익의 배분을 놓고도 미국은 일본식 모델, 즉 사실상의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는데, 투자처는 미국이 정하고 수익도 투자 원리금 변제 전에는 미국과 일본이 절반씩 나눠 갖되 변제 후에는 미국이 90%를 가져가는 조건이다. 특히 대미 투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안에 이뤄져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미국이 관세를 올릴 수 있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한국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20%, 내년도 예산안 728조원의 67% 정도를 달러 현금으로 미국에 넘겨줘야 한다. 그나마 일본은 준기축통화국인 데다 엔과 달러의 통화 스와프도 무제한 가능해 대규모 달러 유출로 인한 외환위기 발생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지난 8월 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63억 달러로 GDP 대비 23% 수준이다. 이는 한국과 경제 구조가 비슷한 대만(77%)을 비롯해 스위스(124%), 홍콩(116%) 등과 비교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수년에 걸쳐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를 빼서 쓴다고 해도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 국채 금리가 상승해 한국 정부의 이자 부담이 폭증하게 된다.
달러 현금 조달을 위해 한국 정부가 원화 표시 국채를 대거 발행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로 바꾸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원/달러 환율이 치솟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안전장치’의 일환으로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정해진 환율로 빌려올 수 있는 통화 스와프를 미국에 요청했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느니 25%의 관세를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지난 11일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수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대미 상품 수출액은 GDP의 7.3% 정도인 1320억 달러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관세를 15%가 아닌 25%를 부과하더라도 수출액 감소는 125억 달러(약 17조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125억 달러의 수출액을 보호하려면 3500억 달러를 내야 한다고 한국에 요구하는 것”이라며 “그 금액의 20분의 1을 대미 수출 감소로 피해를 보는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커 선임연구원은 자신이 추정한 한국의 대미 상품 수출액 피해 규모 산정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거래에선 이해득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연이은 외신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요구 조건이 지나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2일 보도된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공개된 미국 시사잡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선 "미국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터뷰가 다분히 '여론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해도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는 일방적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효과는 상호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평균 실효 관세율이 2022년 1.5%에서 상호관세 부과 이후 18.3%로 10배 이상 폭증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되면 수입물가 폭등으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던 인플레이션 유령의 소환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미국의 경제 성장이 둔화되거나 침체되는 상황과 맞물리면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이란 지적도 있다. 관세를 통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며,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계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무역수지 적자는 자국에서 생산한 것보다 더 소비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생산보다 소비가 많아 무역적자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관세로 해결하려는 것은 ‘언 발에 오줌누기’다. 그럼에도 상당수 미국 유권자들은 '미국 우선주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레토릭’에 동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통상 관세로 인한 무역량 감소는 한국과 같이 미국에 수출하는 나라의 장기 불황을 불러오고, 이는 다시 미국산 원자재와 부품의 수입 감소를 초래해 글로벌 경기침체의 원인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대해 모두가 손해를 보는 ‘루즈-루즈 게임’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정구영 기자 cgy@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