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란한 수사와 장엄한 언어 이면에 숨은 '불안의 그림자'
- '자존'과 '자력갱생'은 공허한 구호…변화의 길 선택해야
제국의 몰락은 언제나 과장된 언어에서 시작됐다. 로마의 쇠퇴기에 '불멸의 영광'이란 구호가 울려 퍼졌고, 청나라 말의 조정 역시 국운이 기울던 순간까지 '만세의 번영'을 외쳤다. 하지만 찬란한 수사들은 균열을 감추는 장막이었다.
오늘은 북한 건국 77주년이다. 노동신문 1면에 실린 '위대한 우리 국가의 존엄과 강대함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사설의 장엄한 언어 역시 그 이면에 외세 의존과 불안의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 건국절 하루 전 게재된 '이 세상 제일 아름답고 위대한 내 조국'이라는 정론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 체제의 핵심 구호는 '자존'과 '자력갱생'이다. 북한은 9일자 노동신문 사설에서도 "화는 외세 의존에서 오고 복은 자력갱생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 구호와 거리가 멀다. 2023년 기준 북한의 대중국 무역 의존도는 전체 교역의 98%를 넘는다. 에너지, 식량, 군수물자 등 핵심 자원의 상당 부분을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북한 스스로 "경제적 예속은 정치적 예속을 낳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 원칙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최근 김정은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 푸틴과 나란히 선 모습은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려는 의도와 동시에, 북한이 북·중·러 연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취약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핵 개발과 군비 증강은 북한 지도부가 체제 유지를 위해 선택한 대표적 전략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는 경제 전반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다.
UN 식량농업기구(FAO)는 2024년 북한의 곡물 생산량이 2020년 대비 30% 이상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세계식량계획(WFP) 역시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임을 지속적으로 경고해왔다. 에너지 부족도 만성적이다. 평양을 제외한 지방 도시와 농촌은 하루 몇 시간만 전기가 공급되며, 겨울철 난방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주민들의 삶을 극한의 고난으로 내몬다. UN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북한 내 5세 미만 아동의 영양실조율은 20%에 달한다. 의료 체계는 낙후돼 있으며, 필수 의약품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교육 현장 역시 교과서, 기자재, 교사 인력 모두 심각하게 부족하다.
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은 당국의 통제와 단속에 시달리며, 생존을 위해 ‘암시장’ 거래에 의존한다. 국가가 주민들의 고통을 방치한 채 체제 수호와 군사력 강화에만 몰두하는 현실은 통치자의 무능과 무책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북한의 자력갱생은 이제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과거 소련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던 것처럼, 북한 역시 자체적으로 경제와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역량이 부족하다. 내부적으로는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외부의 도움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자존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국가의 미래는 한층 더 불투명해진다.
진정한 자존은 외세에 기대지 않고 내부 역량을 강화하며, 주변국과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북한이 외세 의존과 내부 독재라는 이중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주민들의 고난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남북 협력과 개방, 혁신을 통한 실질적 변화만이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진정한 자존을 이룰 수 있는 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이러한 변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을지, 지금이야말로 주목할 시점이다./최경희 SAND연구소장/도쿄대 정치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