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려 쓰는 씨앗’…내수 회복 마중물 vs 재정 위기 초래 논란
- 국방비·주한미군 주둔비 증액…천문학적 재정 부담될 수도

한국 경제는 소규모 개방경제다. 이 때문에 경제 규모에 비해 자본과 상품의 국제 거래가 매우 크고, 자본시장이 정부의 신뢰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대규모 재정적자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훼손될 경우 급격한 자본유출로 자본시장이 공황 상태에 빠지고, 이는 곧장 생산과 고용 등 경제 전반에 타격을 준다.
통상 정부의 재정지출은 조세(세금)와 국채 발행 등을 통해 이뤄진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갖고 있는 데다 국채에 대한 해외 수요가 대규모로 존재한다. 일본의 경우는 지금까지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된 국채가 민간저축에 기반한 국내 수요에 의해 소화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 같은 '완충장치'가 없다. 재정 건전성을 견지하는 것이 유일한 정책 대안이다. 하지만 새로 집권한 이재명 정부가 확장 재정을 표명하면서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돈을 푸는 확장 재정은 단기간에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지만 나랏빚을 눈덩이처럼 키워 재정 위기를 초래하는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 “나라살림을 하다 보니 할 일은 많은데, 쓸 돈이 없어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나라살림을 농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봄에 뿌릴 씨앗이 없어 밭을 묵힐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며 "지금 씨를 한 됫박 뿌려서 가을에 한 가마를 거둘 수 있다면 당연히 빌려서라도 씨를 뿌려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내수 부진으로 세수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사실상 대규모 국채 발행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 들어 지난 7월 말까지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빌려다 쓴 일시대출금은 누적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인 114조원에 달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인 2020년의 90조5000억원, 세수 펑크가 심했던 2023년의 100조8000억원보다 많다.
사전적 의미에서 한국은행의 대(對)정부 일시대출금제도는 세입과 세출 간 시차에 따라 발생하는 일시적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이용하는 자금조달 수단이다. 개인이 시중은행에 마이너스 통장(신용한도 대출)을 열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자금을 충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정부 일시대출금은 연간 한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빌리고 갚는 초단기 대출로 이듬해 1월 중순까지 모두 상환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른바 ‘한은 마통’을 많이 이용하는 것은 돈을 쓸 곳(세출)에 비해 세금(세입)이 부족해 재원을 임시변통하는 일이 잦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정부의 세수 결손을 메우는 편법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68조6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국민연금 등 4대보장성기금을 빼 실질적인 나라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적자가 94조3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역대 네 번째로 큰 규모인데, 7월부터 집행이 시작된 2차 추가경정예산 31조8000억원까지 반영되면 적자 폭은 111조6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채무 증가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지난 상반기 기준 1218조4000억원인 국가채무는 올해 연말 1301조9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도 48.1%에서 49.1%로 늘어난다.
저성장과 내수 부진, 이로 인한 세수 여건 악화는 재정적자를 더욱 심화시키고, 추가 재원 마련을 위한 대규모 국채 발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하면 공급 증가로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 금리는 올라 정부의 이자 부담이 더 커지게 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정부의 국채 이자 비용은 2020년 18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28조2000억원으로 4년 간 51.4%, 연평균 13%씩 증가했다. 2020년 이후 3%대였던 정부 총지출 대비 국채 이자 비중도 2023년 4%를 찍고, 지난해에는 4.4%까지 높아졌다. 올해 국채 이자 비용은 3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국방비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은 '복병'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물론 국방비 증액은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공식화하고, 당초 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됐던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양국 간 후속 논의에서 다뤄질 공산이 크다. '진짜 청구서'는 잠시 미뤄졌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의 국방비는 GDP 대비 2.6% 수준이다. 해외 언론은 트럼프 행정부가 GDP 대비 3.8%까지 증액을 원하는 것으로 보도했는데, GDP를 상수로 둔다면 이는 '천문학적'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8일 “한국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 달러(약 13조7000억원)를 내야 한다”고 요구한 바 있다. 이는 지난해 관리재정수지 적자 110조4000억원의 11%에 해당한다. 국가재정 전체로 보면 나라살림 적자가 10%가량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국방비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은 단발성 지출이 아니다. 한 번 규모가 커지면 이후 줄어들 가능성은 낮다. 이는 한국의 재정 운용 구조, 그리고 국민 세금 부담과 직결된다.
한국 경제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두 차례의 경제 위기를 재정 건전성을 기반으로 극복했다. 하지만 재정 건전성은 한 번 무너지면 회복이 어렵다.
특히 이재명 정부의 확장 재정이 내수 회복의 마중물이 되려면 무엇보다 재정의 선순환 구조가 뒷받침돼야 한다. 전(全) 국민 소비 쿠폰 지급처럼 ‘빌린 씨앗’을 당장 배고픔을 달랠 식량으로 사용해 버리거나 옥토가 아닌 척박한 불모지에 뿌리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수 있다./정구영 기자 sandtimes.co.kr
#이재명 #나라살림 #나랏빚 #한은 마통 #국채 #국방비 #재정 건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