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갑제 대표 인터뷰, "가난과 전쟁 딛고 세계적 경제대국 돼"
- "한반도에 성공과 실패 사례 공존…평화적 자유통일로 가야"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분단 80주년이다. 또 대한민국 건국 77주년이 되는 해다. 해방의 환희와 분단의 비극이 같은 해에 시작된 지 80년. 그 시간의 전부를 몸소 겪은 세대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1945년생 ‘해방둥이’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로 50여 년을 살아오며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현장에서 목격해온 그는 “대한민국 80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토리”라고 단언했다.
이달 초, 이재명 대통령은 대표 보수 논객인 조갑제 대표와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을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약 2시간의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 통합에 앞장서며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선 4월, 조갑제 대표는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비공개로 만나 편안하게 대화했다고 회상했다. 일부에선 “보수가 진보 확장에 이용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조갑제 대표는 “나도 이용했다”고 담담히 응수했다. 그는 “대화는 솔직했고, 서로 다름 속의 일치점을 찾았다”며 진영 논리가 만든 분열을 경계했다.
조갑제 대표는 1945년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나 이듬해 부모의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부산고 졸업 후 부산수산대학을 중퇴하고, 1971년 국제신문(舊 부산국제신보)에 수석 입사하며 언론인의 길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 취재 등으로 신군부 시절 해직되는 고초도 겪었다. 이후 월간 마당 편집장을 거쳐 1983년 조선일보 월간조선부에 합류, 1990년대 보수 논객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1년에는 월간조선이 독립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고, 2005년 ‘조갑제닷컴’을 설립해 대표로 활동 중이다. 저술 활동도 활발한데, 대표 저서로 ‘박정희 전기–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외 다수가 있다.
12일 서울 종로구 오피시아 빌딩에 위치한 조갑제닷컴 사무실에서 만난 조갑제 대표는 자신을 “1945년에 태어난 진짜 해방둥이”라고 소개했다. “1945년생이 해방둥이죠. 그해 남한에서만 54만 명이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절반이 세상을 떠났고, 절반이 남아 있죠. 저는 1945년 해방 두 달 뒤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말 그대로 진짜 해방둥이입니다.”
조갑제 대표는 1971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50년 넘게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기록해왔다. 그는 지난 80년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더 그레이티스트 스토리 에버 톨드(The Greatest Story Ever Told).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과 전쟁을 딛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위대한 이야기가 후세에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후손들이 잘못 기록하고, 잘못 기억해서 더 그레이티스트 스토리 네버 톨드가 돼버렸습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1979년 10월 궁정동 안가 사건이 터진 날, 조갑제 대표는 차가운 가을밤 공기를 가르며 서빙고 보안사 분실 앞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긴박하게 드나드는 군용 지프와 무전기 잡음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날 새벽의 공기는 역사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의 냄새가 났죠.”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탱크와 장갑차가 시내를 가로질렀다. 그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 뒤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의 외침이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현장의 열기와 두려움, 그리고 결연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해방과 분단 80년, 한반도엔 위대한 문명 건설과 실패가 공존
조갑제 대표는 “한반도 80년 역사는 분단의 역사”라고 전제하면서도, 대한민국만 놓고 보면 “위대한 문명 건설의 역사”라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대한민국)와 가장 실패한 사례(북한)가 한반도에 공존합니다.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사는 원래 1민족 1국가 체제입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예외는 후삼국 수십 년, 그리고 지금의 80년 분단뿐입니다.”
그는 독일·이탈리아처럼 다수의 국가로 분열된 역사를 겪은 유럽과 달리, 한민족은 통일 지향성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언젠가는 통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지를 헌법에 새겨 넣은 게 대한민국입니다.”
조갑제 대표는 헌법 1조, 3조, 4조를 차례로 언급했다.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합니다. 3조는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규정해 북한도 우리 영토임을 명확히 합니다. 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규정합니다. 세 조항을 종합하면, 북한 정권을 없애고 자유통일로 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라는 국가 명령입니다.”
그는 남북 대결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입니다.”
광복 80주년, 분단 80주년, 건국 77주년이 겹친 올해. 조갑제 대표는 “국민과 정부가 함께 이 위대한 이야기를 기려야 한다”고 했다. “한국 현대사는 세계가 주목해야 할 문명사적 성취입니다. 그러나 기록과 기억이 부실하면, 위대한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우리 세대가 남은 시간을 다해 그 이야기를 올바르게 써야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생생한 전쟁 체험담을 이어갔다.
해방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5살이던 조갑제 대표는 “6·25가 유년 시절 기억 속 첫 장면"이라고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1950년 여름, 경북 청송군 안덕면에서 다섯살 생일을 맞았다. 그해 7월, 인민군이 마을에 진입했고, 한동안 북한 치하가 이어졌다. “아군 전투기가 우리 마을을 오폭해 집이 불타고, 키우던 소가 불고기가 됐어요. 담배 말리는 창고에 숨어 연기 마시며 위기를 모면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소년의 눈에 전쟁은 ‘무서움’보다 ‘구경거리’였다. “산 너머로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오가는 걸 마치 탁구공처럼 봤죠. 저녁 노을 위로 불빛이 오가는 게 신기했어요.” 하지만 그는 덧붙였다. “어린 저는 몰랐지만, 아버지 세대는 그 전쟁을 온몸으로 견뎌냈습니다.”
1945년 10월,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국적이 네 번 바뀌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일본 국적이었죠. 1946년 초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미군정 시절이라 무국적에 가까웠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이 세워져 국적을 얻었지만, 전쟁 때 북한 치하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 됐다가 국군 수복으로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죠.”
그는 웃으며 “서울에서 피난 안 간 대한제국 출생자들은 6·25와 중공군 개입을 거치며 국적이 7~8번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다.
조갑제 대표는 “휴전선 하나 사이에 두고 같은 민족의 운명이 이렇게 달라진 예가 세계사에 또 있겠냐”며 남북한의 생활 격차를 짚었다. “남북 평균 키는 10cm 차이가 나고, 평균 수명은 1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북한에선 살 찌는 게 소원이고, 남한에선 살 빼는 게 소원입니다. 웃을 얘기가 아니라 비극입니다.”
그는 이 상태를 방치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평화적으로 자유통일을 해야 합니다. 2500만 북한 동포가 우리처럼 자유롭게 사는 날을 만드는 것, 그걸 잊는 순간 대한민국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이미 그 위기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인민군 치하에서 그는 어린이 대상 세뇌 교육을 목격했다. “아이들에게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게 했죠. 저는 안 갔지만, 지금도 어릴 때 배운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히 그가 살던 마을은 큰 피해 없이 전쟁을 넘겼다. “우리 아버지가 마을 대표로 양쪽 사이를 잘 중재해 피를 흘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참혹했습니다.”
조갑제 대표는 80년의 개인사와 민족사를 함께 회고하며 “북한은 사회주의 독재,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우리는 미국과 손잡고 일본과도 수교하며 줄을 잘 섰습니다. 이런 선택의 차이가 민족의 운명을 갈랐죠. 대한민국의 위대한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하려면, 자유통일로 가야 합니다."
해방둥이로 지켜 본 대한민국 80년의 변화에 대해 경이롭다고 했다. “해방 직후 청송군에는 자동차가 한 두대뿐이었어요. 지금은 우리나라 전체 보유 대수가 2000만대를 넘고, 서울만 해도 약 500만대가 굴러다니죠. 80년 사이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건 도시화입니다.”
조갑제 대표는 광복과 분단, 산업화를 현장에서 지켜본 세대다. 그가 꼽은 대한민국의 변화는 자동차만이 아니었다. “벌거숭이였던 산이 숲으로 덮였고, 댐과 산업시설이 전국에 들어섰죠.”
조갑제 대표는 대한민국 80년의 변화를 세 단어로 압축했다. 도시화, 산림화, 산업화다.
“해방 직후엔 서울조차 자동차가 2000대 남짓이었어요. 청송처럼 산골 마을에는 자동차가 구경거리였죠. 하지만 지금은 인구의 80% 이상이 도시에 살고, 산림 녹화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푸른 나라가 됐습니다.”
산림화는 1970년대 이후의 치적이라고 했다. “벌목으로 민둥산이던 곳에 나무를 심고, 산불을 줄이니 산이 회복됐죠. 이건 전쟁 폐허에서 회복한 산업화와 맞물린 변화입니다.”
조갑제 대표가 특히 강조한 건 댐 건설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은 물 부족 국가였습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1300㎜로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에요.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 지나면 가뭄에 시달렸죠.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 제한 급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는 댐입니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4대강 유역 개발 사업을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했다. “1970년대에만 큰 댐 10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충주댐, 안동댐, 소양강댐 같은 곳이죠. 특히 수도권 물 공급의 핵심은 이 시기에 완성됐습니다. 만약 그때 댐을 짓지 않았다면 지금은 반대 여론 때문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조갑제 대표는 “댐 건설이 없었다면 수도권 인구가 지금처럼 모여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은 산업의 생명줄입니다. 공장도, 가정도 물이 없으면 버틸 수 없습니다. 1970년대 결단 덕분에 오늘날 산업시설이 제대로 돌아가고, 시민들이 한여름에도 수돗물을 걱정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자동차, 숲, 그리고 댐. 해방 직후와 지금을 비교하면, 이 세 가지가 대한민국의 얼굴을 바꿔놓았습니다.”/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