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침 실패 책임 물어 남로당 처형…연안파와 소련파도 숙청
- 주체사상 확립 후 후계자 선정, 권력 유지 위해 주민 삶 통제

김일성은 남침 실패의 원인으로 박헌영 세력을 꼽아 반당·간첩행위 집단으로 몰았다. 김일성과 박헌영./국가기록원
김일성은 남침 실패의 원인으로 박헌영 세력을 꼽아 반당·간첩행위 집단으로 몰았다. 김일성과 박헌영./국가기록원

광복의 환희와 분단의 비극이 교차한 지 80년, 북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흐름을 짚어본다.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당시 김일성이 휘두른 권력투쟁의 칼날은 동지들에게로 향했다. 북한 내부에서는 전쟁 책임을 둘러싼 격렬한 공방이 벌어졌는데, 김일성은 남침 실패의 원인을 남로당 탓으로 돌렸다. 

“남조선 인민 20만명이 궐기해 인민군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박헌영 세력을 반당·간첩행위 집단으로 몰았다. 그 결과 1955년 12월, 박헌영·이강국·이승엽·임화 등 남로당 출신 간부 10여명은 특별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처형됐다. 한때 '혁명의 동지'였던 이들이 순식간에 ‘역적’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남로당 숙청은 시작에 불과했다.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는 전후 복구를 둘러싸고 ‘중공업 우선’과 ‘농업·경공업 우선’ 노선이 맞붙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경제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었지만 실상은 ‘스탈린 격하’ 문제였다.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의 흐름에 따라 김일성의 독재를 완화하자는 연안파·소련파의 주장은 곧 김일성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김일성은 최창익·박창옥·윤공흠 등을 ‘종파분자’로 규정, 숙청을 준비했다. 숙청 기도는 예상치 못한 반격을 맞았다. 윤공흠·서휘·이필규 등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피해 김일성의 전횡을 폭로했다. 중국과 소련은 팽덕회와 미코얀을 평양에 보내 숙청 중지를 요구했고, 김일성은 일시적으로 출당 결정을 철회했다. 이것이 1956년의 ‘8월 종파사건’이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듯 보였던 8월 종파사건은 불과 1년 뒤 피비린내 나는 보복으로 돌아왔다. 1957년 8월, 최창익·박창옥 등 사건 연루 인물들이 '국가변란 음모' 혐의로 전원 체포·투옥돼 숙청된 것이다. 숙청을 피한 자들은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소련 국적을 회복해 소련으로 향했다.

이 사건은 북한 전역을 뒤흔드는 대대적 사상검열로 이어졌다. 1957년 5월 30일, 김일성이 주재한 당중앙위원회 상무회의는 '전당·전인민적인 투쟁 전개 결의'(5.30 결의)를 채택했다.

처음 1년은 지방당 종파분자 색출에 집중했지만 1958년 12월부터는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주도하는 ‘집중지도사업’으로 전환됐다.

이로 인해 당 간부와 내무성, 대학생 7000명이 동원돼 전국민 신원조사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핵심계층·중간계층·적대계층’ 3등급, 51개 세부 계층으로 나뉘었다. 적대계층에는 월남자 가족, 기독교인, 지주·부농, 8월 종파분자 동조자 등이 포함됐다.

집중지도사업은 단순 검열이 아니었다. 내각 결정 149호에 따라 불순분자는 해안선·휴전선 20km, 평양·개성 50km, 각 시에서 20km 이상 떨어진 오지로 강제 추방됐다.

평양 5000세대, 개성 600세대, 황해도 1500세대, 강원도 1000세대 등 도합 8000세대 이상이 이 조치로 쫓겨났다. 당원 출당·강등률은 지역에 따라 60~80%에 달했다. 그 양상은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을 연상케 했다. 주민 강제이주, 정치범 수용소 수감, 농업 협동화까지 북한 사회 전반이 철저한 통제 체제로 재편됐다.

숙청을 마무리한 김일성은 1961년 4차 당대회에서 주체 노선을 천명하며 7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2년에는 4대 군사노선(전인민 무장화·전국 요새화·전군 간부화·전군 현대화)을 채택,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이상을 군사력에 투입했다.

그 결과 경제는 급격히 침체했고, 노동력 총동원을 명분으로 한 ‘천리마운동’이 시작됐다. 이는 생산성 향상보다는 주민 착취와 정치사상 동원의 수단이었다.

경제 위기에도 김일성은 대남전략을 강화했다. 1964년 ‘3대혁명역량강화’ 노선을 제시하며, 북한혁명기지 강화·남한 혁명역량 강화·국제혁명 지원을 내세웠다.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의에서는 베트남식 무장투쟁 모델을 남한에 적용하려고 했다. 1968년 1월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침투를 시도,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지만 실패했다. 

1968년 말~1969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DMZ 무장도발 등이 이어졌다. 특히 북한이 1968년 1월 미 해군 푸에블로호 나포로 미국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69년 4월에는 동해상에서 미군 EC-121 정찰기를 격추해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러한 도발은 단순 군사행위가 아니라 남한 내부의 불안 조성과 혁명 역량 확대를 위한 장기 전략의 일환이었다.

정적 숙청, 대남 군사도발로 대내외 위기를 조성한 북한은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체계’로 확립했다. 이 시점부터 후계자 선정이 본격화됐다. 1972년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지만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973년 청년학생 100만명을 동원한 ‘3대혁명소조’ 운동을 시작했다.

8월 종파사건으로 시작된 대숙청은 체제 반대세력 제거 → 전면 군사화 → 대남도발 강화로 이어졌다. 권력 유지와 대남혁명이라는 두 목표를 위해 북한 정권은 주민의 삶을 철저히 동원·통제했고, 한반도 긴장은 상시화됐다. /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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