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제의’ 이미 짜여진 전쟁 시나리오 서막
- ‘총선거’ 평화 구호 뒤에 숨긴 ‘남한 병합’ 속내

1950년 5월,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전선은 남북이 동시에 총선거를 치러 통일 입법기관을 세우자고 제의했다. 8·15 해방 5주년을 앞두고 ‘평화통일' 분위기를 조성한것이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소련군 고문단이 작성한 작전계획에 따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사실 이 ‘평화 제의’는 이미 짜여진 전쟁 시나리오 속의 연막이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한반도 분단 종식을 위한 총회를 열고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 가능한 지역에서 자유·민주 선거를 치러 통일정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은 남한의 합법 정부 수립에 맞서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초대 수상에 오른 김일성은 8대 강령 1조항으로 ‘국토완정, 38도선 철폐, 남조선 병합’을 내걸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중국의 군사 지원이 있었다. 1949년 2월, 김일성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회담 후 ‘조소경제문화협정’과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은 탱크 240여대, 각종 중포, 장비를 제공해 20만 북한군을 무장시켰다. 여기에 중국 공산당군 출신 조선인 병력 2만9500명을 북한에 편입, 서울 공격 임무를 맡긴 두 개 사단으로 재편했다.
1950년 3~4월,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를 찾아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받았다. 그해 4월 28일 열린 북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총선거’라는 평화 구호 뒤에 숨긴 ‘남한 병합’ 속내를 굳혔다. 그리고 두 달 뒤, 북한군은 전면 남침을 감행했고,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3년여 전쟁으로 남한군 14만7000명, 미군 3만4000명, 유엔군 1만4000명,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18만4000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370만 이재민, 10만 고아,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당사자인 스탈린은 휴전 의지가 없었다. 1951년 가을부터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휴전 논의가 시작됐지만, 그는 전쟁 장기화를 지시했다. 전쟁으로 타격받는 것은 미국·중국·남북한일 뿐, 소련 패권 확장에는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결국 스탈린 사망(1953년 3월 5일) 4개월 뒤인 7월 27일에서야 휴전이 성립됐다.
역사는 말한다. 북한의 ‘평화’ 제안은 종종 ‘침략’의 전주곡이었다. 8·15 총선 제안 뒤 두 달 만의 남침이 그 전형이었다. 북한은 최근 8.15를 '제1해방의 날'로 규정했다. '제2해방의 날'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영토완정 개념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영토완정’을 향한 북한의 집착이 여전히 한반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