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병참기지 기반의 공업력에도…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 ‘백두혈통’의 실패한 경제 정책…‘유훈’이란 명목으로 답습

일제시대 한반도는 조선(朝鮮)으로 불리면서 남선(南鮮), 서선(西鮮), 북선(北鮮) 등으로 세분화된 지역 명칭도 갖고 있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 이후 패망할 때까지 서선이라고 부른 평안남북도, 북선이라고 칭한 함경남북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투자를 집중했다.
특히 1936~1942년 7대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북선을 보지 않고 조선을 말하지 말라"고 할 만큼 북선 개발에 힘을 쏟았다. 북선의 시설 중 일부는 후발주자인 관계로 일본 본토의 시설보다 더 좋은 기능을 지닌 상태였다는 말도 있었다.
실제로 일제는 동양 최대라는 압록강의 수풍댐은 물론 부전강 유역에 4개의 발전소를 건설한 뒤 이 전력을 바탕으로 제철소와 화학단지, 각종 기계공장을 건설해 북선 전역을 군수산업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이 결과 1940년에는 함경남도의 공업 생산액 비중이 23.2%에 달해 줄곧 1위를 달리던 경기도를 제치고 조선 내 13개 도(道)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함경북도 역시 경기도에 이어 전국 3위를 기록했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이 같은 병참기지 기반과 공업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반면 남한(한국)은 일제시대에 구축된 북공남농(北工南農), 북중남경(北重南輕)의 산업구조 때문에 오랫동안 고전했다. 그럼에도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는 오늘날까지 북한 경제의 목표는 ‘이밥(쌀밥)에 고깃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밥에 고깃국은 김일성 주석이 1962년 천리마 운동 당시 제시한 구호였다. 북한 주민들에게 이밥과 고깃국을 먹을 것이라며 부유한 미래를 약속한 것이다. 1982년 신년사에서는 ‘쌀이 공산주의’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북한 경제는 시작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 주석은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계급을 몰락시키고,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동시에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전략적 조치로 여겨졌다.
하지만 토지 분배의 불균형과 집단농장 체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농업 생산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농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도 꾀하지 못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처음의 선택이나 방향이 잘못되면 그 이후의 과정도 계속해서 어긋날 수밖에 없다.
실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핵심 과제로 국유화가 진행된 1950년대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공장, 광산, 상업시설 등 대부분의 생산 수단이 국가의 소유로 이전됐고, 중앙계획경제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중앙계획경제체제는 중앙정부가 경제 전체의 생산, 배분, 가격 등을 직접 계획·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국유화는 사유재산을 근절하고, 사회주의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였지만 경제 효율성 저하, 생산성 감소, 관리 비효율성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중앙계획경제체제의 특성상 정보의 비대칭성과 의사결정의 지연으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6.25 전쟁 이후 북한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구(舊)소련, 중공, 체코 등으로부터 많은 자금과 기술 원조를 받았다. 해방 후 일제의 병참기지 기반과 공업력을 물려받은데 이어 6.25 전쟁 후엔 냉전시대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하지만 경제 실패의 그림자는 떨쳐내지 못했다.
이 시기 북한 경제의 특징은 중공업 중심의 발전 전략이다. 군수산업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경공업과 농업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이 같은 정책은 군사력 강화와 공업화를 통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려는 김일성 주석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지만 소비재 부족과 농업 생산성 저하를 심화시켰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은 주체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확립하고,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대변되는 자립경제 노선을 강화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외부 기술 도입과 자본 유입이 제한되면서 북한 경제는 발전이 정체됐고, 기술 낙후는 더욱 심화됐다. 경제 실패에 가속도가 붙은 셈이다.
그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최악의 기근과 각종 대북제재로 흔들리는 북한을 선군정치를 앞세운 공포정치로 유지했다. 나선 경제특구 등 제한적인 개방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전면적 개방은 북한 체제를 위협할 것으로 판단해 폐쇄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의 손자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대 들어 북한은 계획경제와 비공식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이중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시장을 공식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면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일정 부분 묵인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씨 일가가 설계하고, 계승한 경제 상황의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사망 1년 전인 1993년 신년사에서도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고 싶다는 우리 인민의 숙원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한 목표"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전에 수령의 '유훈'이라며 이를 자주 인용했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2019년 3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국 당 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전체 인민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하려는 것은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평생 염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당면하고도 절박한 문제며, 또한 항구적인 경제 발전 전략이기도 하다"고 썼다. 북한을 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로 만든, ‘백두혈통’의 실패한 경제 정책을 유훈이란 명목으로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정구영 기자 cgy@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