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현 ”지방공장 건설과 주택 개량, 새마을운동 따라한 것"
- 혈통만으로 4대 세습 정당화 못해…성과 못 내면 체제 위기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지금 경제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최근 추진 중인 ‘지방공업 발전 20×10 정책’은 사실상 박정희 정부 시절 새마을공장 정책을 베낀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최근 샌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매년 20개 시·군에 공장을 세워 10년 간 200개를 만들겠다는 계획인데, 이는 결국 열악한 물류 인프라를 지역 단위 자급체제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라며 “공장 몇 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체제 유지의 생존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북한 농촌의 주택 개량사업도 박정희 정부 시절 새마을운동의 지붕 개량사업과 판박이”라며 “욕하면서 배운 셈”이라고 했다.
새마을공장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기업의 경영 합리화와 노동자의 동참”을 강조하면서 본격화됐다. 이 운동은 농촌 중심이었던 새마을운동을 산업현장으로 확장한 것으로 당시 정부가 내세운 ‘수출 증대’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적 조치로 평가된다. 북한이 1960~70년대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벤치마킹한다는 것이다.
샌드타임즈는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아 기획 시리즈의 일환으로 1945년생 '해방둥이'인 정세현 전 장관을 최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본사 회의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1945년 6월 만주에서 태어난 정세현 전 장관은 통일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으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정세현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상, 중, 하 세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이 이렇게 인민경제 발전에 올인하는 건 더는 ‘백두혈통’만으로는 4대 세습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이 최근 경의선 철도와 도로 연결을 스스로 차단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내가 들은 바로는 도로 쪽에서는 폭 10m, 깊이 5m, 길이 150m 정도로 땅을 파냈다고 한다”며 “그런데 그 흙을 다른 데 버리지 않고 도로 옆에 그대로 쌓아뒀다고 한다. 다시 밀어 넣으면 된다, 그런 메시지”라고 전했다.
그는 “북한의 일련의 행동 뒤에는 내부적인 정치 계산이 깔려 있다”며 “경제 성과를 내야만 김정은 체제가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북한이 철도와 도로를 끊었지만 복구 가능한 형태로 남겨둔 이유에 대해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은 윤석열 정부가 2027년 5월 9일까지 집권하는 동안은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보고, 코가 꿰이지 않으려고 선을 그은 것”이라며 “하지만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최근 남측의 변화 조짐을 북한이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6월 초 통일부에서 대북 전단 자제를 요청했고, 경기도 역시 전단 단속에 나섰다. 6월 10일에는 대통령 지시 형식으로 확성기 방송 중단을 발표했다. 그랬더니 북한도 하루 만에 대남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이건 상호간 신호 주고받기가 시작된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조용히 이루어진 ‘북한 주민 송환’ 사례도 주목했다. “2월에서 3월 쯤 표류해 내려온 북한 주민 6명이 있었는데, 통일부가 조용히 관리하다가 동해선에서 북으로 돌려보냈다. 업적처럼 떠벌리지 않고 말이다. 북측은 그걸 보며 ‘이재명 정부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이 상황이 1995년 쌀 지원 회담 당시 북한의 반응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이 베이징 회담에서 ‘남쪽은 전래 동화도 안 가르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형이 동생 집 앞에 볏단을 놓고, 동생이 또 형 집 앞에 놓는다는 이야기다. 받는 사람도 자존심이 있다는 걸 남쪽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북한은 지금도 그런 관계를 원한다. 체면을 구기지 않고 도움받고 싶어 한다. 그게 열등 의식의 반작용이다.”
그는 새로 취임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나타냈다. “정동영 장관이 20년 만에 복귀했다. 가끔 전화해서 ‘선배님 이건 어떻게 보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나는 1977년부터 노동신문을 분석한 사람이고, 그는 정치에서 온 인물이니까 서로 다른 시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조합이 좋을 수도 있다.”
그는 결국 남북관계의 회복은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방식”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남한을 ‘적대적 2국가’라고 부르지만 그건 얼마든지 ‘공존적 2국가’로 바뀔 수 있는 수식어일 뿐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 1991년 기본합의서 수준의 공존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는 북한이 과거의 남북관계 질서를 바꾸려는 의도라고 했다. 그는 과거 북한과 회담 시 "'왜 북에서는 북남이라고 부릅니까? 동서남북 순서면 남북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랬더니 웃으면서 그러더라고.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부르죠. 왜 당신네 순서를 따라야 합니까?’ 그 말이 참 오래 남았다."
말의 순서에서부터 북한의 관점이 드러난다고 했다. 단순한 어휘의 차이를 넘어 ‘관계 설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때 그게 그냥 웃자고 한 농담이긴 했지만,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도 담겨 있다고 본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질서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그 질서를 조금 바꿔가려는 조짐이 보인다.”
정세현 전 장관이 말하는 ‘질서의 변화’는 북한의 2국가론에서 시작된다. 2023년 말~2024년 초, 북한은 ‘민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까지 철거하며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당시 나는 특별 수행원으로 육로로 평양에 갔다. 대동강 건너기 전에 세워진 그 기념탑을 봤다. 정말 거대했다. 그런데 그걸 통째로 철거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강한 메시지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언행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북한이 갑자기 ‘우리는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입장을 바꾸는 듯하다. 윤석열 정부 때는 그런 말 꺼냈다간 도리어 역풍을 맞을까봐 조심했을 텐데, 지금 이재명 대통령 체제를 보니 뭔가 잘해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긴 거다. 그러니까 아직은 먼저 도와달라는 말은 못하지만, 남쪽이 먼저 다가오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는 태도인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다가오는 8~9월을 ‘북한이 한국 정부를 판단할 리트머스 시험지’로 본다.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보고, 한 열흘 뒤인 8월 18일부터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시작된다. 과거에는 을지 프리덤 가디언이라 고 불렸던 이 훈련이 지금은 을지 프리덤 쉴드(UFS)로 바뀌었고, 9월에도 또 하나 있다. 일본도 아마 참가할 것이다. 이 훈련의 성격과 규모가 북한 입장에서는 군사적 위협일 수밖에 없다.”
그는 북한이 겉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훈련만 없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자주 털어놨다고 회고한다. “기록이 남는 회담 자리에서는 말 안 한다. 쉬는 시간에 담배 피우면서, ‘군사훈련 좀 규모 줄이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얘기한다.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와도, 전략폭격기가 괌에서 날아와도 북한은 오금이 저린다고 한다. 훈련 대응에 필요한 기름만 해도 엄청난데, 그걸 인민경제에 쓰면 얼마나 좋겠나?”
정세현 전 장관은 올 하반기 훈련이 북한 경제에 미칠 실질적 피해도 지적한다. “북한은 지금 지방공업발전 20×10 정책이란 이름으로 매년 20개 군·시에 공장을 짓고 있다. 동시에 2021년 시작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이 올해로 마감된다. 6월 말 당 전원회의에서 6개월 남은 시한을 결속하자고 다짐했다. 이게 실현되지 않으면 김정은 정권은 인민들에게 줄 선물을 잃는 것이다. 정치적 타격도 클 것이다.”
그는 김정은의 후계 구도까지 연결해 해석했다. “김정은은 항일 빨치산 전통이라는 정통성 없이 권력을 계승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민들에게 생활 향상이라는 실질적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게 바로 후계자의 정당성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군사훈련 때문에 경제에 차질이 생기면, 그 모든 설계가 흔들릴 수 있다.”
그는 끝으로 ‘건초는 해가 비칠 때 말려야 한다’는 속담을 인용했다. “북쪽이 문을 닫지 않고 있다. 북한은 이재명 정부 5년을 활용해야 한다. 남북이 적이 아니라 협력하는 두 국가 관계로 가야 한다는 시그널을 북은 이미 주고 있다. 우리는 그걸 읽고 움직여야 한다.” /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