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인터뷰…"1970년대 김정일 방식 연상”
- '왕궁'서 태어난 김정은, 건강 면에서 아버지 김정일보다 불안

“1970년대 당중앙이라는 말이 김정일 띄우기의 신호였듯 현재 당중앙은 김주애를 암시합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북한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당중앙'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그는 “1980년에 김정일을 공식적으로 내세우기 전 1970년대부터 당중앙이라는 암시적 표현을 사용했던 방식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지난 6월 19일 노동신문 1면 기사에 당중앙 표현이 34번이나 등장하고 '불가항력' 등의 표현이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표현의 주체는 김정은의 딸 김주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
샌드타임즈는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아 기획 시리즈의 일환으로 1945년생 '해방둥이'인 정세현 전 장관을 최근 서울 강남구 수서동 본사 회의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1945년 6월 만주에서 태어난 정세현 전 장관은 통일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으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정세현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상, 중, 하 세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지난 1977년 통일연구원(舊 통일원)에서 경력을 시작한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을 48년째 관찰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을 읽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떤 단어를 반복하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를 파악하는 감각”이라며 “이번 당중앙 표현도 그 맥락에서 보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노동신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당중앙이라는 표현에 대해 “권력 승계와 관련된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의 후계 구도가 본격화되기 전에도 당중앙이라는 용어가 암호처럼 쓰였다”며 “최근의 당중앙 용어 역시 김정은의 딸 김주애를 염두에 둔 언급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중앙이라는 표현이 김정은 이후를 준비하는 신호일 수 있다며 북한이 후계 구도를 서두르는 배경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건강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을 내놨다.
정세현 전 장관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건강 상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설명했다. 그는 “김일성은 82세까지 살 만큼 건강했는데, 이는 항일 빨치산 시절부터 단련된 체력 덕분이라 본다”며 “반면 아버지보다 고생을 덜한 김정일은 만 70세를 넘기지 못했고, 왕궁에서 태어난 김정은은 체중 등 건강 면에서 김정일보다 불안 요소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강조되는 ‘유일적 영도체계’나 '불가항력’ 등의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중앙의 유일적 영도, 우리 당과 국가의 존엄, 불가항력 같은 표현은 4대 세습에 대한 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메시지"라며 "이는 내부의 불안 심리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권력이 공고할수록 담론은 간결해지기 마련인데, 북한은 지금 오히려 복잡한 수사와 상징을 늘려가고 있다”며 “이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긴장과 대비의 증거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통일부 장관 퇴임 이후에도 민화협 상임의장을 맡아 대북 민간교류 활동을 이어오며 북한 내부를 직접 관찰한 경험이 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본관 2층, 김정일이 수업을 들었다는 교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며 “당시 해당 교실이 비워져 있고, 자리를 성역화해 두었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평양 방문 당시 을밀대 방문을 요청했으며, 시간이 다소 걸린 끝에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현장을 찾았을 때는 마침 갑작스런 소나기로 출발이 지연된 상황이었다. 도착해 보니 모란봉 일대에서 장구를 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누각 위에서는 누군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잔디밭에 돗자리까지 깔려 있는 등 다소 과장된 환영 분위기였다”며 “북한이 '행복한 인민'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면서 표정과 말투까지 살펴보다보니 정세현 전 장관의 말투나 언행이 북한 사람 같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1998년 북측과의 차관급 회담 이후 있었던 일화를 꺼냈다. “회담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니 어떤 기자들은 제가 북측 대표인 줄 알았다더군요.” 그는 당시 북측 인사인 전금철과 비교해 “나는 딱딱하고 긴장된 얼굴로 얘기했고, 오히려 전금철은 부드럽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며 “그래서 역할이 뒤바뀌어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전한 또 다른 일화는 국정원 고위직과의 만남에서 벌어졌다. “비공식 회담 내용을 듣고 싶다고 해서 어느 술집에 초대받았는데, 마담이 저를 보자마자 뒷걸음질치며 방으로 안내하더군요.” 이유를 묻자 “혹시 김일성 배지 어디 있냐”고 되물으며 자신을 북한 인사로 오해했다고 했다. 그는 “국정원이 북쪽 사람을 데려와 공작하는 줄 알았다는 말에 당시 얼마나 내가 북쪽 이미지였는지를 실감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100일 지난 갓난아기로 평양역서 노숙…다시 평양에 온 건 운명이었죠.”
정세현 전 장관은 1945년 6월 만주 벌판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말 그의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흑룡강성 자무스로 향했고, 그 곳에서 정세현 전 장관이 태어났다. 해방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자무스는 송화강·우수리강·흑룡강이 만나는 접점에 있는 곳입니다. 당시엔 ‘삼강성’이라고 불렸죠. 그 추운 만주 땅에서 갓난아기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동’으로 시작됐다. 해방 직후 귀국길에 오른 가족은 자무스에서부터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고, 정세현 전 장관은 생후 100일 무렵 한겨울 평양역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강보에 쌓인 채 평양역 광장에서 노숙했답니다. 그게 제 인생의 첫 ‘평양 체류’였어요. 그리고 수십 년 뒤 장관으로 다시 평양에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이후 통일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민화협 상임의장으로서 여러 차례 평양을 찾았다. 그중 한 번은 고려호텔 특각(특별 객실)에서 묵었다. 30층이 넘는 고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속에 정세현 전 장관은 과거의 자신과 다시 마주했다.
“고려호텔 창밖으로 평양역이 보이는데, 그 순간 문득 ‘내가 저기서 100일 된 아기로 이틀을 버티며 남쪽으로 내려갔고 다시 여기로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자체가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었죠.”
정세현 전 장관은 자신을 ‘북방형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혹한의 만주에서 태어나고, 이른 시절부터 민족과 분단, 통일을 사유해 온 그의 궤적은 단순한 공직자의 이력이 아니다. 그는 “그런 태생적 배경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은 없지만 북방의 냉기와 이주의 기억은 가족 안에 깊게 남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려온 뒤 부모님의 고향인 전북으로 돌아왔죠. 공식적인 고향은 전북이지만, 출생지는 만주 자무스입니다.”
“북한을 보는 눈, 인생 전체로 축적된 감각입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철도의 꿈… 김일성·김정일도 계산은 빨랐어요. 결국 철도만 뚫으면 남북관계는 멈추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전략이었고, 김일성·김정일도 그 가능성을 읽고 있었어요.”
정세현 전 장관은 1994년 7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됐던 시점을 회고하며 남북철도 연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돼 있었어요. 그 회담이 실현됐더라면 남북철도 연결 논의는 훨씬 일찍 궤도에 올랐을 겁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이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북측 경제 상황을 보고하며 “지금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조언했다. “북한은 1980년대 제로 성장 후 1990년대 들어 마이너스 성장을 시작했어요. 경제 지원을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프레임을 짜야 할 때였습니다.”
정세현 전 장관은 그때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김일성 주석이 철도 연결을 먼저 제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사망 직전인 1994년 6월 30일, 벨기에 노동당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남측에서 기차가 평양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TSR)로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 담화록은 훗날 ‘김일성 선집’ 47권에 실렸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통과 수수료만 해도 연간 15억 달러가 들어온다며 ‘내가 왜 이걸 안 하겠는가’라고 했어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죠.”
하지만 김일성 주석은 회담을 17일 앞두고 7월 8일 갑작스레 사망했고, 남북철도 연결 구상은 6년 뒤 김대중 정부 들어 본격화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철도 연결을 햇볕정책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습니다.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철의 실크로드’를 제안했고, 그해 9월 경의선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공사는 3개월 만에 멈췄다. 2001년 내내 중단 상태였다. 정세현 전 장관이 다시 전면에 나선 건 2002년 1월 통일부 장관 취임 이후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찬 간담회에서 자재를 주고서라도 연결해야 한다고 먼저 얘기했습니다. 비료 20만톤 정도의 비용이면 레일과 침목을 공급할 수 있다고 설명했죠.”
그의 발언은 보도됐고, 3월 무렵 북한이 반응을 보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동원 특사를 만나 “경의선뿐 아니라 동해선도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반응을 생생히 기억했다.
“임 특사가 ‘강릉 이후 북쪽으로는 철로가 없다’고 하자 김정일 위원장이 깜짝 놀랐다고 해요. 곧바로 리명수 작전국장을 불러 고함을 치면서 왜 이제야 보고하냐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경의선뿐 아니라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까지 논의가 확장됐다. 당시 실무협상은 훗날 문재인 정부 통일부 장관을 지낸 조명균 교류협력국장이 이끌었다.
북측은 철도 공사에 필요한 자재뿐 아니라 장비도 요청했다. “포크레인, 불도저는 물론 자갈 깨는 기계, 비옷, 면장갑까지 요구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걸 우리가 댔습니다.”
하지만 2023년 10월 북한은 일방적으로 남북철도 연결 사업을 중단시켰다. 정세현 전 장관은 “우리가 어렵게 닦아놓은 길을 스스로 끊은 셈”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경의선 철도를 끊었지만, 그 흙을 옆에 그대로 쌓아뒀다는 건 뭘 의미하겠습니까. 언젠가 다시 밀어 넣겠다는 거죠.”/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