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군, 평양 진주 후 ‘김일성 체제’ 구축 착수
- 신의주 반공학생시위… 무력으로 진압된 민심

오는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이 날은 광복의 기쁨과 함께 민족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남과 북은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남한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반면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한 북한은 3대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하며 국제사회의 최빈국이자 인권탄압 국가로 전락했다. 광복 80주년, 분단 8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 본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 의사를 통보했고 다음 날인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서울은 하루 종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시민들은 방송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다음날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풀려나면서서야 해방 사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경성 시민들은 일왕의 항복 방송임을 알아차리고 해방의 기쁨을 터뜨렸다.
해방의 감격도 잠시, 곧 한반도에는 새로운 경계선이 그어졌다. 일본군 대본영은 미국의 지시에 따라 항복 절차를 각 지역 일본군에 하달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를 나누기 위한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다. 이 선은 훗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상징이 됐다.
1945년 8월 22일, 소련군은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며 북조선 지역에서 군정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앞세워 자율적 통치인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 군정당국이 철저히 통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주의 세력은 배제되고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소련군은 김일성을 처음 대중 앞에 등장시켰다. 소련은 당시 한반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던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포장해 내세웠다.
스탈린은 전후 동북아 전략의 일환으로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려 했다. 이를 위해 소련 외교부는 북한 점령을 위한 정교한 계획을 실행했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정권 구축 작업이 본격화됐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고 같은 날 인민군이 창설됐다.
이후 김일성 정권은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남녀평등법 제정 등을 통해 체제 기반을 강화했다. 1947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최고 통치기구로 격상시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북한은 이 시점을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독재국가로 향해 나아갔다.
북한에서 공산 정권 수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45년 11월 평북 용암포와 신의주 등지에서는 공산당과 소련군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신의주에서는 3만 5,000명이 거리로 나섰지만, 소련군과 공산당은 항공기와 탱크까지 동원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수십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북한 내 반공 민족세력이 몰락하는 전환점이 됐다.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고, 북한 역시 이에 대응해 자체적인 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앞서 그해 4월, 단독선거 추진에 반발한 김구, 김규식 등 남한의 민족주의 세력은 김일성의 제안에 따라 평양을 방문해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측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고 남한에서는 김구 외에도 조소앙, 홍명희 등 다양한 인사들이 방북했다.
연석회의에서는 단일 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 철수를 촉구했지만 이미 남북 간의 분단 구도는 급속히 고착화되고 있었다.
해방 후 좌우 합작과 통일정부 수립 시도는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단독 정부(대한민국)가 수립된 데 이어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김일성이 내각수반으로 선출되었고, 김두봉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국호, 국기, 헌법 등이 제정되며 북한은 사실상 완전한 독립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북한은 형식상 ‘조선인이 세운 자주국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위성정권에 가까웠다. 북한 정권 수립은 한반도 분단을 확정짓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소련과 중국이 곧바로 북한을 승인했고, 남북한은 서로를 부정하는 ‘두 개의 조선’ 체제로 굳어지게 됐다. 한반도는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권, 두 개의 체제,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