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범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신치범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1. 서론 : 6・25전쟁과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재편

2023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이 손을 맞잡은 장면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70여 년 전 6·25전쟁에서 기원한 삼각 안보협력 체계의 '역사적 회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은 단순한 한반도 내 군사 충돌을 넘어, 냉전기 국제질서의 대전환점을 촉발한 사건이었다. 이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념적 갈등이 처음으로 실전으로 표출된 사례로, 미국은 일본에 주둔 중이던 제8군을 즉시 파병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유엔군의 병참 및 후방기지로 기능하면서 전후 미일 안보체제의 기틀이 형성되었고, 이는 한미동맹과 미일안보조약, 나아가 삼국 간 안보협력 메커니즘으로 진화하는 구조적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다.

2. 본론 :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의 탄생과 진화

2.1. 기원 : 6・25전쟁과 한미일 삼각구도 형성

6・25전쟁 직후 미국은 대한민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10월 1일)을 체결하며 대한민국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핵심 전방기지로 위치시켰다. 이후 주한미군의 상시 주둔, 연합작전계획, 연합 지휘구조 확립 등으로 이어지며 실질적 동맹체제로 진화했다.

6·25전쟁은 당시 헌법 제9조 하에서 비무장국가로 유지되던 일본이 안보 주체로 재편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50년 경찰예비대, 1952년 보안대, 1954년 자위대(육상, 해상, 항공) 창설로 이어지는 일본의 군사력 복원 과정은,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기반한 사실상의 재무장 과정이었다.

1951년 『미일안보조약』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함께 일본 내 미군 주둔을 제도화하고,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전략에서 후방기지로 편입시키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는 전시 중 미국이 구상한 삼각 안보구조의 제도화 초기 모델로 기능했으며, 1960년 신안보조약 체결로 협력의 제도화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2.2. 진화 : 1차 북핵 위기 이후 한미일 메커니즘의 중층적 구조 탄생

1990년대 제1차 북핵 위기를 계기로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었다. 이후 이 합의 이행을 위해 한미일 삼국을 중심으로 한 레짐 KEDO(1995년), TCOG(1999년), TDS(2002년) 등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이 연속적으로 출현하면서 한미일 삼국간 중층적 구조가 탄생했다.

2014년 한미일 정보공유약정(TISA), 2016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로 정보협력까지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을 매개로 하지 않고도 한일 양국 간 정밀 군사정보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북한 미사일 발사 등 긴급 사안에 있어 실시간 공동 대응능력을 확보하게 해준 결정적 진전이었다.

2.3. 정점 : 캠프 데이비드 체제의 형성과 제도화

2023년 8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은 연례 안보협의체 창설, 정례적 연합훈련, 공동경보체계 구축 등 삼국 안보협력을 제도적으로 상시화한 역사적 이정표였다. 협력의 범위는 군사 안보에 그치지 않고 인도·태평양 전략 공조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기존 메커니즘의 ‘정점’이자 고도화된 중층적 협력구조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가장 고도화・제도화된 형태로 평가받는 한미일 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모습이었다.

3. 결론 : 전략적 필연으로서의 한미일 안보협력

6·25전쟁은 한미일 안보협력의 실전 출발점이자, 삼자 연대의 현실성을 입증한 역사적 사례였다. 오늘날 북중러 전략공조의 강화, 북한의 고도화된 위협, 대만·남중국해를 둘러싼 불안정성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삼각 안보협력이 단순한 선택이 아닌, 필연적 구조로 작동해야 함을 증명하고 있다.

6·25의 교훈은 과거의 비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위기마다 연대의 해법을 실전으로 증명해 온 삼국의 협력사는, 오늘날 불확실성 속에서 평화를 위한 구조적 청사진이자 전략적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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