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통합의 핵심 ‘다름의 인정’,,, 외교도 상대 인정해야 성과
- 대륙과 해양 간 정교한 균형 전략 필요... 단선 보다 다층 전략
- 美, 하노이 회담 놓쳐서는 안 될 기회 ..미북 관계 정상화 필요
- 일본과의 협력 선택 아닌 필수... 일본의 과거사 성찰 선행돼야
- 대만 문제 무력 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외교력 극대화해야

라종일 교수가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의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샌드타임즈 
라종일 교수가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의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샌드타임즈 

새 정부 출범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또한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을 안고 오랜 시간 학계와 현실 정치의 가교 역할을 해온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라 교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국정원 1차장, 주영국·주일본 대사를 지낸 최고의 외교·안보 전문가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둔 시점에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라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소회를 밝혔다.

인터뷰는 한국 외교의 방향, 미·북 관계, 한·일관계,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 미·중 갈등, 국내 민주주의의 과제까지 폭넓게 이어졌다.

"외교는 위기를 피하고 기회를 찾는 기술" ... 역대 정부 비교적 안정적 외교 운영

라종일 교수는 "외교는 항상 두 개의 제약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며 역대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큰 틀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우리가 바라는 외교 노선과 그것을 수행해야 할 국제 정세 이 두 요소 사이의 균형이 외교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략이 있어도 정세가 따라주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죠."

그는 구한말을 예로 들며 조선이 독립을 수호하려 했으나 일본이 국제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위를 사실상 인정받았던 현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당시 외교적 대응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정세가 우리에게 불리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전략에도 깊은 교훈을 던진다.

그는 한국의 분단 현실과 주변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 제약을 언급하며 역대 정부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외교를 운영해 왔음을 평가했다.

“우리는 아직 분단국가이고 북한이라는 위협 요소가 존재하며 스스로 모든 외교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강대국도 아닙니다. 그 속에서 큰 위기 없이 이끌어온 것 자체가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 상황이 결코 안주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경고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앞으로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지가 관건입니다."

"트럼프, 고립주의 예외 아닌 예고된 변화" ... "더 넓고 복잡한 지도 펼칠 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집권 이후 외교 지형은 크게 요동치고 있다. 특히 한미 관계와 북미 관계에 대한 전망은 국민적 관심사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트럼프가 파격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미국은 항상 고립주의적 경향을 안고 있었어요. 2차 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주도했던 시기가 오히려 예외적이었던 겁니다.”

그는 트럼프의 대외정책 기조가 단지 개인의 스타일만은 아니며 미국이 점점 자국의 실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강조했다.

“미국이 모든 세계 문제를 다 떠맡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이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더 복잡하고 정교한 외교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는 한국 외교의 방향에 대해 조언을 덧붙였다.

“과거엔 해양 세력 중심의 외교 노선이 주축이었지만 이제는 대륙과 해양 사이에서 더 정교한 균형 전략이 필요합니다. 단선적인 선택이 아니라 다층적인 전략의 시대입니다.”

그의 말은 분단된 국토, 주변 강대국의 각축 속에서 작은 나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창의적인 생존 전략에 대한 조언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외교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다시 한 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트럼프, 김정은을 협상에 끌어들이려 주한미군 감축카드 활용할 수도

2019년 하노이 회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미 관계는 교착 상태를 이어오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주한미군 감축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그는 이 또한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책의 성격이 강합니다. 협상은 결국 '줄 것과 받을 것'이 분명해야 작동하는데 미국은 카드로 주한미군 감축까지도 활용하려 할 수 있죠.”

그는 북미 협상의 성패는 어느 한 쪽의 강경함보다는 상호 현실 인식과 전략적 타협 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 하노이 회담 놓쳐서는 안 될 기회" ...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시도했어야”

라 교수는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돌아보며 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하노이 회담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서로가 잠정적인 타협을 통해 공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한 점을 한반도 외교의 결정적 실책으로 평가했다.

"하노이 회담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습니다. 그때 미국이 조금 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그리고 우리 정부가 더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면 지금 한반도 정세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길 바랐습니다. 무리가 있더라도 그것이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여는 열쇠였다고 생각해요."

라 교수는 미국의 ‘압박 중심’ 접근에 문제를 제기하며 북한이 비핵화를 통해 얻으려 했던 진짜 목적은 체제 안정과 경제 회복이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 일변도 외교를 벗어나고 싶어했을 겁니다. 북한 인민에게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중국은 그런 경제 지원을 해주지 않아요. 결국 미국밖에 길이 없었다고 봅니다.”

그는 미국이 당시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CVID)를 즉시 요구했던 것은 현실을 외면한 태도였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핵’은 체제 보장의 수단이었고 이는 한 번에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경제를 살리고 미국은 안보 우려를 줄이는 방식으로 절충의 모델을 찾았어야죠. 핵무기를 일부 감축하고 단계적 검증을 거치면서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면 지금쯤 북미 관계는 훨씬 안정됐을 겁니다.”

그는 북한의 핵 완전 폐기를 전제조건으로 내건 미국의 태도가 실질적 해결 가능성을 막았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보유국으로 공식 인정받지 못한 나라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전례를 언급하며 현실적인 협상 전략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하노이 회담 때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의 회담을 주선하고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보여줬던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노이 회담에서 너무 소극적이었어요. 초청을 못 받았다고 해도 비공식으로라도 연락망을 가동하고 조율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라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팀이 지나치게 ‘책임’을 두려워했다며 “중재자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때 회담이 무산되지 않도록 막았어야죠. 그 일 담당했던 분들에게도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책임지기엔 부담스럽다’는 말만 들었어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 책임을 회피하다가 역사적인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 간 직접 대화는 사실상 중단됐다. 그는 “지금은 미국도 북한도 이전만큼 절박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무역 문제, 국내 정치로 너무 바빠요. 북한 문제는 후순위로 밀려났습니다. 북한도 지금은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를 더 활용하고 있죠. 하지만 북한도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이 여전히 경제 회복과 국제적 인정이라는 목표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다만 하노이 회담에서 당했던 “모욕적” 경험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북미 협상이 다시 재개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북한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한 협상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북한도 중국·러시아에만 의존해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압니다. 결국 다시 미국과 대화해야 할 날이 올 겁니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해요.”

한일 수교 60주년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 “실질적 협력 관계로”

올해는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년이 되는 해다. 한일 관계는 윤석열 정부 들어 급속도로 회복되며 협력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와 지정학적 긴장은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만든다. 라종일 교수는 “일본과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정직한 성찰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 교수는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시대에는 일본과의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관계가 필수”라고 했다. “특히 미국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지정학적으로나 전략적으로 한국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정치·경제·안보 모든 면에서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안보 측면에서 한일 간의 협력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현대전에서 자립은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도 미국의 정보력에 의존해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도 정보·기술·전략에서 미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한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협력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도 지적했다. “일본은 군국주의의 잔재를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일본을 위한 것이라도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라 교수는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들며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국민적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 있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결국 일본 국민 3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전범들을 영웅화하는 모습은 일본 국민에게도 한국 국민에게도 상처만 줄 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일본의 패전이 한국에 ‘역설적인 기회’가 되었음을 지적하며 “만약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하지 않고 미국과 타협했더라면 한반도 독립은 100년 이상 걸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라 교수는 “언어는 한 번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만약 일본의 통치가 오래 갔다면, 한글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문화적 동질성 탓에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대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만주족 등의 사례를 들며 “정치적 독립은 힘으로 가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독립은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에서 한일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그는 “한일 외교는 누구든 정권을 잡든 일관되고 전략적인 기조 아래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일 간에는 안보, 경제, 문화 전 분야에서 지속적이고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수출 의존도, 일본의 내수 중심 경제, 그리고 미국과의 3각 안보 협력을 감안하면 일본과의 협력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은 장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는 과거를 감추려 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일본은 전쟁 피해국이자 가해국이라는 이중성을 직시하고 한국은 현실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외교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양국이 함께 손잡고 진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대만 문제가 무력 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외교력 극대화해야

최근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다시금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설까지 제기되며 한반도가 동북아 전략의 핵심 축에서 미·중 간 대결의 전진기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라 교수는 “전쟁을 막는 외교적 상상력과 지역 공동체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 움직임을 언급하며 “이미 미국은 병력 운용을 ‘기동성 중심’으로 재편한 지 20년이 넘었다”며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분쟁 지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유연화하는 방향은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 문제가 무력 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외교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며 “무력 충돌은 중국, 대만, 미국 모두에게 손해”라고 단언했다.

“대만과의 관계 ‘현명한 비공식 외교’로 풀어야”

라 교수는 2000년대 초 김대중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로 대만에 파견됐던 경험을 소개했다. 대만 민진당 집권 이후 김 대통령은 공식 사절을 보내는 대신 라 교수를 비공식 특사로 보내며 메시지를 전했다.

“대만이 독립을 주장하거나 반중 언사를 하면 누구도 돕지 못한다는 경고를 전달했습니다. 천수이볜 총통도 ‘중국을 도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라 교수는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면서도 대만에 비공식적 우호 메시지를 전달하는 정교한 균형 외교를 펼친 바 있다”며 “지금도 그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중관계, 문화와 공동체로 다시 잇자”

오는 11월 경주에서 개최되는 엑스포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문할 가능성이 제기되며 한중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라교수는 “중국과 우리는 적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지난 사드 배치 이후 양국 간 신뢰가 많이 무너졌다”며 “이제는 경제적 이익만이 아닌 ‘문화 공동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공자 대신 한자 문화권 중심의 문화외교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주목하며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 등은 모두 한자 문화권이다. 이 문화적 연대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역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국강병의 유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 교수는 대만 위기나 북핵 문제 등에서 군사적 억지력을 강조하는 목소리에 대해 “부국강병이란 개념은 이미 19세기 말에 실패한 모델”이라고 지적했다.

“국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 국민이 가난해지고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이 희생되는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지금은 유럽연합처럼,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강국(強國)과 대국(大國)의 차이를 언급하며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는 강국은 될 수 있지만 도덕적 지도력을 가진 나라만이 대국이 될 수 있다. 지금 중국이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전쟁보다 공동체를 말해야 할 때”

라 교수는 전쟁이 낳는 참화와 그것을 막기 위한 인간적 상상력을 언급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옛날엔 왕이 왕과 결투를 해 전쟁을 대신했지만 지금 전쟁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전쟁의 시대는 지나가야 합니다. 이 지역에 필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마음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법이 곧 정치의 핵심입니다. 한 나라를 의인화하지 말고 다양한 요소를 봐야 합니다. 외교든, 안보든, 통일이든 결국 사람의 일이거든요.”

라종일 교수는 현 시점에서 북방 외교의 연속성과 확대를 강조했다. 특히 러시아, 중국과의 실용적 외교관계 회복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최근 러시아 대사와의 조찬 회동을 언급하며 러시아가 북한에 도발을 자제시키는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내비쳤다.

“미군이 남한을 지켜주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닙니다. 남한 정부가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면 제어하는 균형의 역할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북한을 설득할 수 있어야 평화를 원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러시아와의 문화적, 역사적 유대감을 언급하며 민간 차원의 교류, 학술 및 문화 협력이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동네에도 러시아 여의사가 있었어요. 그런 게 다 문화적 연결고리입니다.”

라 교수는 특정 국가를 하나의 단일 주체로 보는 태도를 경계했다. 그는 “러시아는 어떻다”, “중국은 이렇다”는 식의 단순화된 인식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 나라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다양한 세력, 다양한 생각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독재적인 정권이라 해도 그 내부엔 견제와 균형, 다양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는 외교 관계를 설정할 때도 이러한 다층적 시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국가의 정권만을 그 나라 전체로 단정하지 말고 그 사회 내부의 복잡성과 역사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통합 말처럼 쉬운 일 아냐… “한국 이만큼 민주정치 한 것도 대단한 일”

“0.7% 차이로 져도 승복하는 것, 이런 건 미국에서도 잘 못 했던 일입니다.”

극단적 양극화가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았다는 질문에 대해 라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성숙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구는 수백 년 걸려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1987년 이후 불과 한 세대 만에 여기까지 왔어요. 이만큼 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친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소련과 공산주의에 희망을 가졌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인간 생명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현실을 목격한 뒤 끝내 결별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은 천국을 만든다는 이상이 너무 높아 사람 죽이는 것을 당연시했어요. 죄 없는 사람도 죽어야 한다는 게 정치가 될 수 있습니까?”

결국 그의 선친은 의회주의를 신념으로 삼고 영국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경험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라 교수의 확고한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께 산다”

라 교수는 국민 통합의 핵심은 ‘다름의 인정’이라고 강조했다. 정치란 결국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해서 남이 틀린 건 아닙니다. 상대방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는 절대로 국민통합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한국 정치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체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도 감옥소에 가보고 당해보면 달라집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정치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 과정이다. 라 교수는 그것을 수백 년에 걸친 서구 정치사의 사례와 자신의 가족사 속에 녹아든 체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새 정부가 나아갈 외교·안보·통일의 방향, 국민통합의 과제 앞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사람”을 이야기했다.

정치는 사람의 일이므로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김명성 기자 kms@sandtimes.co.kr 

저작권자 © 샌드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